세상을 잘 살아가는 이야기

불린 콩을 보면서........경건(敬虔)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뿅망치 2020. 7. 16. 09:23

그제 저녁에 집사람이 김치냉장고에서 보관하던 검정콩을 꺼내서 물에 담궈 놓았다.

집사람 왈 콩을 김치 냉장고에 오래 두었더니 콩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물에 깨끗이 씻어서 친구네도

좀 주고 나머지는 삶아서 냉장고의 냉동실에 두겠다고 한다.

물에 담근 어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싹이 나오려는지 눈이 있는 곳이 제법 부풀어 보인다.

 

씽크대의 쌀배기(쌀 씻는 그릇)에 담겨 있는 콩을 보면서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콩이 퉁퉁 불어서 싹주

머니가 봉긋봉긋한 것을 보니 눈이 나오게 생겼는데 그런 콩을 보니 콩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라고 했더니, 이 양반이 저녁 잘 먹고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하는 눈치이다.

 

***

 

그 콩은 몇 달 동안 김치 냉장고 속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김치 냉장고 속에서 숨 막히게 들어 있다가 꺼

내어서 물에 담가 두었으니 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뜨뜻한 물속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

었던 것이다.

 

콩이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거나 아니거나를 떠나서 콩이 싹을 틔우는 목적은 다음

세대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콩을 물에 불린 사람은 콩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삶기 위해서 물에 불린 것이니 그것도 모르

고 열심히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콩의 입장에서는 사람에게 기만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

겠는가?

 

만약 자신을 삶기 위해서 물에 담근다는 것을 알았다면 열심히 싹을 틔울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어쩔

수 없이 물에 불려지면서도 자신의 몇 시간 뒤에는 삶아져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비통해 하지 않

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콩이 그런 생각을 할 리도 없고 설령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니 인간의 입장에서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말 못하는 식물이라고 하여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생명에 대한 애착

은 인간이나 동물들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는 아끼고 경

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어떤 것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 먹는 어떤 것의 대부분은 위에 삶겨지는 콩과 같이 다른 생명체들이다.

어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법칙

이다. 우리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다른 생명들을 먹고 산다.

야채 곡물 생선 육류.......

그러므도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

해서 신세를 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여야 하며 우리가 경건하

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동물성을 먹지 않는다.

사람들은 살생이라고 말을 하면 동물만을 생각하는데 식물도 생명이니 식물을 먹는 것도 좀 더 넓은 의

미에서 살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살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며 우리 입속으로 들어가는 그

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곧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희생되는 그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으며 특히 인간은 더욱 그렇다.

 

다른 존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는 항상 자신을 위해서 희생한 그들에게 감사를 하면

서 살아야 하고 그리고 경건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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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삶아질 운명인지도 모르면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콩을 보면서 콩에게 미안하다는 마음과 더불어

내가 먹는 모든 것에게 감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그리고 그 희생의 댓가만큼 보람 있게, 그리고 경건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살지 않으면 그들 곧 나를 위

해서 희생한 생명체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으려고 불린 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이제 자연을 보고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여야 하

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든 사람들이 등산을 더 좋아하는 것은 늙어서 할 일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자연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 중에서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건강을 위해서 등산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감상하고 느끼는 등산이 되어야 할 것이며, 건강보다는 그것이 등산의 목적이 되

어야 하지 않겠는가.

 

겨울에 나무들을 보면 잎이 다 떨어지고 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새싹이 틀 눈이 남아 있다.

이 눈은 따뜻한 봄이 오면 잎으로 또는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40대에 그 나무를 보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저 나무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런 준비를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었었다.

 

나무 스스로가 그런 준비를 하였다면 나무는 지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과연 나무는 인간과 같은 지적

존재인가? 만약 지적 존재가 아니면 어떻게 잎을 떨구고 눈을 남길 수가 있는가? 나무 스스로 하지 않았

다면 어떤 지적 존재가 그렇게 했었을 것인데 그 지적 존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로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무에 눈을 만드는 것 과 같은 일을 하는 지적(知的) 존재는 분명히 존재 하지만 인간의 지성으

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인간이 만든 건물들은 자본과 노력과 시간이 투여되어나 나타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것들을 제외한 자연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의 설계와 에너지와 시간

이 투입되어서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눈을 들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 거저나 저절로 되어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불린 콩이나 나뭇잎 하나를 보면서도 신()의 존재와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등도 허투루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삶 또한 경건해 질 수밖에 없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게 되며 그것들이 존재함을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