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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壽命)에 대한 소고(小考) .... 15. 안락사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뿅망치 2020. 9. 10. 09:10

의 연장은 신의 뜻이 아니다.

 

안락사란 병이 들거나 사고로 인해서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이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의 시간

을 줄이기 위해서 일찍 죽게 하는 방법이다.

 

이 의미는 단어의 뜻 그대로의 의미이고 더 확대를 한다면 소위 식물인간이 되어 버려서 소생의 가능성

이 없는 사람의 호흡만이 지속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여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는 것까지 포

함하는 것까지이다.

 

안락사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한 것은 그 것(안락사)

을 시킬지 아닐지를 선택해야하는 당사지가 될 수도 있고 그 것을 당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당사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라는 의미에서이다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아직은 소수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그 것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하

지만 이제 우리는 곧 그 안락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연예인들의 동성애에 금방 관대해진 것처럼...

 

안락사가 무슨 문제가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육신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판

단의 기준도 육신으로 하기 때문에 육신에 집착을 하게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준을 종교(기독교)에서 판단한 것 중에 죽음에 대해서 중복되는 의미를 두고 있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한 것이 성경에 나온다.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960 절에 어떤 청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라 다니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선생님을 따르겠다

고 하자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를 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오라' 고 하는 말씀이 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어떻게 장사를 지내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앞의 죽은 자는 생리적인 기능이 정지된 보통사람들이 말하는 죽은 자이고 뒤의 죽은

자는 살아서 움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창조주)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창조주와 관계가 없어진 사람을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삶에서도 이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통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육신의 생리적인 기능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말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살아 있는'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창조주)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

어 신의 뜻을 알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곧 육신을 위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영혼(靈人體)

를 위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영()과 육신(肉身)의 이중구조로 되어있다면, 인간의 삶은 육신을 위주로 하는 삶이 아니라 영

을 위주로 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구태여 비교한다면 육신은 영을 감싸고 보호하면서 영인체가 성장할 수 있게 하

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과일을 영이라고 한다면 육신은 그 열매를 익게 하는 나

무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 인큐베이터의 존재 목적과 그 나무의 존재 목적은 영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한 것과 과일을 익

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런데 그 인큐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고장 난 인큐베이터 안에다

영혼을 가두어 두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그 영혼마저 상하게 할뿐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나무가 그 과일을 익게 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에 더 달아둔다는 것은 과일

만 더 상하게 할뿐이다..

 

지난번에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 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육신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보는 시각을 달리한다면 죽음을 우리가 보는 세계에서는 죽음이지만 영계(靈界) 쪽에서 본다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는 산고(産苦)를 겪게 되어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 산고로 인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의 생명은

위험이 가중된다.

 

죽음의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이 길어지는 것이 그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을 출발하는 당사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그에게 유리할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은 인간이 육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또 인큐베이터와 같은 존재일 뿐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영혼

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

지 않는 것들이다.

 

육신의 삶과 죽음은 영혼의 삶과 죽음에 비한다면 덜 중요하다.

육신은 결국 물질로 된 유한한 존재일 뿐이며 영원할 수도 없다.

육신과 영혼의 관계를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삶과 죽음에만 집착을 할 뿐이다.

 

육신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면 이미 육신의 사명은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그 육

신은 그 안에 있는 영혼의 감옥이 될 뿐이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인큐베이터 속에 어린아이를 계속 넣어두는 것이 그 어린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안락사의 문제도 결국 영혼과 육신의 문제로 풀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