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세계 4대 종교라고 하더라도 그 종교가 그 나라에서 종교로서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그 유적지는 그냥 유적지일 뿐이며 경쟁관계에 있었던 종교에게 밀려난 종교였다면 그 유적지의 보존도 어려웠다는 것을 인도와 네팔의 여행에서 보면서 느끼게 된다.
인도와 네팔에서의 불교 유적지는 파괴되어 폐허 속에 있다가 최근에 발굴되고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바라나시에서 고락푸르까지는 기차를 고락푸르에서 네팔의 국경인 소나울리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다.
사르나트에서 밤 열시 기차를 타고 밤새워 고락푸르라는 곳에 도착을 하니 새벽이 되었다.
소나울리까지는 12명이 탈 수 있는 봉고 같은 것을 네팔에서 직접 사람이 와서 우리를 태우고 간다.
아직 내리지 않은 가차에서 본 고락푸르 기차역
역안에서 보이는 고락푸르의 모습
역 옆에 있는 광장에 있는 오토바이들...중고매매하는 곳인가?
출근하는 시민들의 모습...
학생들이 등교를 하기 위해 오토릭샤(택시)를 타기 위해서 모여 있는데 차비 흥정을 하는지...운전수의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도로 옆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물론 각자 자신의 돈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사 먹어야 하지만 인도의 음식이 낯이 설기 때문에 가이드가 안내를 해준다.
네팔의 국경도시인 소나울리 근처에 가니 길가에 트럭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통관을 기다리는 트럭이라고 한다.
인도와 네팔의 국경도시인 소나울리에 도착하니 라는 곳에 도착하니 열두시 정도가 되었는데 국경의 세관이 있는 도시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시골 같은 곳이다.
인도의 세관까지 인력거를 타고 가서 통관을 하고 인도 국경을 넘어 네팔로 들어가면 곧바로 그 자리에서 비자를 신청하여 그 자리에서 발급을 해 준다.
수속도 간단하고 사람들이나 건물들도 별로 달라보이지 않고 언어와 글씨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으니(글씨는 같은 모양이고 언어는 어차피 못 알아 들으니) 국경을 통과한다는 느낌이 없다.
3면이 바다인 우리는 외국을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하기 때문에 남한 사람에게 육지로 연결된 국경을 처음 통과하는 신기한 체험이다.
우리에게 휴전선은 국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사람들은 휴전선을 넘어 다닐 일이 없으니 인도와 네팔의 이런 국경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곳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는데 본래는 같은 동네였을 것이고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길 가에 있는 식당...카나 카자나라는 간판들이 인도에는 가끔 있는지 인터넷 검색을 하면 어려군데서 나온다.
식당 뒤에 있는 공원
네팔로 가는 인도의 트럭들 국경을 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도출입구 관리소로 빨리 가야 한다고 해서 인력거를 타고 ...도착한 출입국 관리소에서 가이드기 출국 수속을 밟는 중
줄 지어선 트럭 사이를 걸어서
검문소를 통과한다.
네팔 국경 검문소..소지품 검사 같은 것 하지 않는다.
네팔 출입국 관리소 ...비자 신청을 하는 중
인도의 국경을 넘어 네팔로 들어오면 인도 국민이나 네팔의 국민들이 다 가난해 가난해 보지이만 도로나 주변의 건물들을 보게 되면 국력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당연히 네팔의 도로나 주변의 건물이 낡아있다.
네팔은 아시아에서 꼴찌에서 몇 번째 갈 정도로 가장 가난한 나라여서 전기도 시간제로 들어오는 나라이다.
우리가 갈 때는 1월로 그곳도 절기로는 겨울이기 때문에 저녁에는 쌀쌀하기 때문에 각자가 가지고 간 침낭을 침대위에다 놓고 침낭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자야 한다.
인도의 소나울리와 같이 붙어 있는 네팔의 국경도시 벨라히야..
네팔의 국경에서 룸비니로 들어가는 길은 잠간으로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룸비니는 도시는 고사하고 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룸비니의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큰 담장으로 둘러쳐저 있고 나무들도 울창하여 안을 볼 수가 없지만 주변은 추수가 끝난 넓은 들판에 까마귀만 날아다니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저녁에 잠을 그냥 자기가 뭣해서 걸어서 룸비니 게이트 앞에 있는 가게로 걸어가 봤지만 염주와 같은 불교 기념품과 용품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벨라히야에서 룸비니로 가는 도중의 모습..해가 질 무렵이라서 더 적적해 보인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 중...이 차로 네팔의 포카라로 포카라에서 카드만두로 이동을 한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본 룸비니의 들판 ...빈 들판에 까마귀만 날아다닌다.
이튿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숙소의 옥상에서 본 들판
룸비니 정문이 있는 쪽 담장..건물이 보이는 쪽에 정문이 있다.
옥상에서 보이는 동쪽..주변이 다 이렇게 생겼다.
룸비니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신지는 지금부터 2559년 전으로 전세계의 불교신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네팔도 힌두교도가 81%가 되고 불교는 11% 이슬람이 4%라고 하니 네팔의 국교는 힌두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래서 이곳 역시 사르나트처럼 세계 불교인들의 순례지요 관광지의 성격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네팔이 불교국가 였더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곳을 성역(聖域)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곳이 석가의 탄생지로 확인이 된 것은 1895년 독일 고고학자인 포이러(Feuhrer)가 이곳에서 석주 하나를 발견하여 그 석주가 아쇼카왕의 석주로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쇠퇴하였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그 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서 국교화가 된 나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가의 탄생지가 잊혀지게 된 것은 불교가 힌두교나 이슬람으로부터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페허를 만들고 땅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 흔적이 이렇게 사라질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패자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말살이 되는 것처럼 그 지역에서 패배한 종교는 흔적이 말살되는 것이 인생사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이 석가의 탄생지로 밝혀지면서 발굴을 하게 되고 룸비니의 석가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지가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으로 등제되었다고 한다.
룸비니 경내
숙소에서 걸어서 룸비니 정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에서 아쇼카왕의 석주와 석가가 탄생한 자리 위에 세워진 마야 데비 템플이 있는 곳까지는 한참을 걸어들어간다.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려보니 장방형으로 된 경내가 무척이나 넓다.
아쇼카왕 석주 근처에는 동남아의 불교국가들과 개인 순례자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기도를 하거나 단체로 설명을 듣거나 하면서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들어가는 정문...정문 아치 위에 있는 상징물을 보게 되면 네팔의 불교는 티벳불교의 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러가는데 이런 연못도 있고
이런 길을 한 참 걸어서 들어간다.
사찰의 담장에 걸려 있는 타르쵸...룽다가 아니다.
우리는 순례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면서 둘러보아야 하기 때문에 차분하게 들러 볼 시간이 없어서 중요한 부분들만 주마간산 식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여기도 아쇼카왕의 석주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있는 석주는 석주 위의 사자상만 없을 뿐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마찬가지로 아쇼카왕의 석주를 보고 부처님의 탄생지를 확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여기가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면 주변에 불교유적지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 주변의 불교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수령을 가늠할 수 없는 보리수나무들이 많으며 보리수나무에는 손바닥한 천에 불경을 적은 타르초라고 불리는 깃발들이 만국기처럼 달려있고 사람들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설법을 듣는다.
석가가 태어난 곳이라는 자리는 건물이 지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가 볼 수가 없다.
거기에는 부처님이 첫 발자욱을 걸었다는 자욱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순례객이 아닌 관광객들인 우리들에게는 그 건물이 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불교신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불교신자들이 아닌 사람들로 그런 발자욱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일 수밖에 없다.
아쇼카 왕의 석주와 마야 데비 템플
타르초가 걸려 있는 보리수 나무와 구룡연못이 연못에서 태어난 석가를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보리수 나무 밑에 기도를 하기 위해서 모인 승려들(?)...참고로 타르쵸와 룽다는 경문을 프린트 하여 바람의 힘으로 경문을 전파하는 목적은 같으나 룽다는 장대에 세워서 깃발처럼 달아놓은 것을 룽다라고 한다.
기념진을 찍는 승려들
마야 데비 테플로 내부에는 석가가 탄생한 장소와 발자국이 있는데 내부는 사진을 못 찍게 한다.
아쇼카왕의 석주...순례를 온 사람이 기념품을 걸어 놓았다.
룸비니 경내는 돌아보는데 몇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다.
그리고 올림픽 공원에 있는 것처럼 영원히 꺼지지 않는 평화를 기원하는 불도 있고 경내 안인지 밖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르나트처럼 각 나라에서 지은 사찰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지은 절이 대성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거리가 멀어서 가보지 못했고 테벳불교에서 지은 사찰이 가깝게 있어서 거기만 들렀는데 거기에는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불
그 불이 세워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설명서
스님들과 일반인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명상을 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이 걷거나...
30여개국에서 지을 절들이 있는 지역...가장 가가운 곳에 있는 절...네팔의 카드만두에 있는 보디나트와 같은 절
걸어서는 다 돌아볼 수도 없고 오늘 포카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이 사찰에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아이들도 보인다.
티벳이나 네팔 같은 곳에는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장자가 아닌 차자는 절에 가서 스님이 되어야 했다.
차자가 결혼을 하여 분가를 하게 되면 나누어줄 토지가 없기 때문에 차남은 스님의 길을 걷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고 그들을 보게 되면 안쓰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전생을 믿지 않지만 티벳의 절에 있는 소년들과 청년들을 보면 저들은 전생에 무슨 사연이 있어서 강제로 비구의 길을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 시간여 남짓 둘러보고 아는 스님이 있어서 스님에게 드릴 염주와 작은 불상을 사고 10시 경에 봉고와 같은 미니버스를 타고 다음 여행지인 포카라로 출발을 한다.
인도의 출입국사무소를 가기 위해서 인력거 릭샤를 탄다.
룸비니 경내
끼지지 않는 평화의 불과 앞에 보이는 공원
사찰과 아이들
아래는 두산백과의 룸비니 설명임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평원에 있는 룸비니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가 탄생한 곳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Bodhgaya), 첫 설법을 한 녹야원, 열반에 든 쿠쉬나가르(Kushinagar)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로, 1895년 독일 고고학자인 포이러(Feuhrer)가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언덕을 배회하다 석주 하나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까지는 인도에서의 불교 쇠퇴와 함께 황폐해져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623년 샤카족의 왕비인 마야부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산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에 있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게 되고 그곳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기원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도 이곳을 찾아 석가모니를 찬미하며 네 개의 불탑과 꼭대기에 말의 형상을 가진 석주 하나를 세웠다. 현재는 부러진 상태로 그 일부만 남아 룸비니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이 석주에는 재위 20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성스러운 마을인 이곳을 찾았으며 룸비니 사람들은 세금을 감면받고 생산물의 8분의 1만을 징수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 장면을 묘사한 부조를 모시고 있는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은 11세기에 지어져서 1943년에 재건된 곳이다. 그리고 이 사원 남쪽에는 싯다르타 연못 혹은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기 전 목욕을 하고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목욕시켰다고 알려진 성스러운 곳이다. 이렇게 석가모니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룸비니는 199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룸비니 국제사원지구에는 한국사찰인 대성석가사(大聖釋迦寺)를 비롯해 각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살린 수많은 사원들이 건설되어, 전세계에서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석가모니의 자비와 형제애를 전하고 있다. 이 외에도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의 동전, 각종 종교 서적과 조각, 그리고 룸비니와 석가모니를 묘사한 방대한 양의 각국 우표가 전시되어 있는 룸비니 박물관과, 종교, 철학, 예술, 건축에 관련한 12,000여 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는 룸비니 국제연구소(Lumbini International Research Institu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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