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하면 일반 사람들은 ‘무소유’를 떠올릴 정도로 그분이 쓴 무소유라는 단편 수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다. 그분은 불교에 귀의를 해서 55년 동안 승려생활을 하시면서 불교관련 책도 쓰고
수필을 쓰시다가 2010년 3.11일 78세를 일기로 입적을 하신 분으로 생전에 무소유 사상과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펼치신 분이다.
그 분이 1976년에 자신의 가르침을 담은 <무소유>라는 수필집을 발간하였는데 그 수필집은 370만
권이 판매된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볼교인으로보다는 무소유라는 수필을
쓴 수필가로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 국민들에게 무소유 사상의 돌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입적을 하면서 앞으로는 내가 쓴 글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절판(絶版)의유언을
남기게 되는데 그 유언으로 인해서 무소유라는 수필집이 열 배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가 되는 해프닝
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분이 왜 이런 유언을 하고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그냥 궁금
한 것으로 끝이 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한 내용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분이 수십 권의 책을 쓰면서 무소유와 향기롭게 사는 삶에 대한 사상을 전파를 하셨는데 그 서적에
그분의 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책의 출판을 금지하였으니, 그분과 동시대의 사람이 아닌 후인들
은 그 책을 볼 수가 없으니 그 분의 사상을 접할 기회가 없게 된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본인이 주장한 내용이 진실이 아니어서 였을까?
아니면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고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헛되다고 생각한 것일까?
우리는 그런 결정을 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유
는 나름대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왜 그 분은 그런 결정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물론 이
결론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니 옳거나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지극히 사적인 생각이
니.....
우리는 글을 쓸 때 누군가가 내가 쓴 글을 읽어보기를 바라고 감동을 느끼거나 지식의 지평이 넓어지
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이러저러한 사정과 사연에 대해서 누군가 공감을 해 주고 위로를 해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그러므로 글은 나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소유의 삶과 향기로운 삶에 대한 설파(說破)를 그만하도록 했을까? 이유가 분명이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무소유의 삶이 일상생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
닐까?
출가한 스님이나 신부(神父)나 수녀(修女)와 같이 도의 길이나 종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무
소유의 삶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있는 사람 곧 결혼한 목사라든
가 가족이 있는 대처승(帶妻僧) 같은 경우에는 무소유의 삶이 불가능해진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
으니 어떻게 무소유의 삶을 살겠는가.....
하물며 종교인의 삶이라도 그러할 진대 일반 사람들이야 무소유의 삶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하
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삶이라도 힘이 들 것인데 무소유의 삶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가능하지 않
은 것이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유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소유(無所有)의 삶이라든가 향기로운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많은 것들
을 희생을 필요로 한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이런 욕망들을 절제를 해야 하는
데 이런 절제나 희생은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으며 단순한 만족감만으로는 부
족하다.
무소유의 개념은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과 처음부터 가지지 않는
것 등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무소유를 통해서 얻는 것이 소유를 통해서 얻는 것보다 더 좋은 무엇
인가가 있어야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든가 가지고 싶은 욕망을 버리게 된다.
곧 무소유를 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것은 가지지 않는 것, 곧 무소유를 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소유를 함으로서 얻어지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유를 하지 않음
으로 소유를 하는 것보다 더 더 크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소유의 삶은 결국 이 세상의 삶만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의 삶까지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야만 의미가
있어지게 된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을 손에서 놓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강제로
빼앗는 방법이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방법은 더 좋은 장난감을 주고 그 것을 손에서 놓게 하는 방법
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버리기를 바란다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어야만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게 된다.
사람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살으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서 놓게 하는 방법이라면 강제로 버리게 하거나 무소유의 삶을 살았을 때 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무소유의 삶을 살고 청빈의 삶을 살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선량한 삶을 살 수 있고
등등의 좋은 점이 있겠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다른 무엇인가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분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설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
다. 그 분은 분명히 이 세상의 삶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지만 그것이
세상에 받아 들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저서의 출판을 금지한 것이 아닐까...
.
현명한 아이는 촛불을 손으로 만져서 뜨겁다는 것을 깨닫지 않는다. 불은 뜨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촛불을 만지지 않아도 뜨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살면서 죽음의 고비를 겪지 않고도 무소유까지는 않더라도 쓸데없는 재물이나 명예
를 위해서 자신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
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교통사고 같은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살면서 중요
하게 여겼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세상이 존재 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삶이 바뀌게 된다.
그런데 왜 꼭 뜨거운 맛을 보고 나야만 하는가...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갔다 왔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을 수백 만 명이 읽어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감동의 물결이 한 번 지나간
것으로 그만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소유의 삶을 권유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겠는가....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을 가기 위한 삶을 준비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지 않더라도 그런 삶을 살 것 아니겠는가....
무소유라는 것은 물질 뿐만이 아닌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들일 것들로 ‘쇠귀에
경(經)읽기’인 인간들에게 실망을 해서 절판(絶版)유언을 하지 않았을까...
*****
왜 절판을 유언하였을까애 대해서 지인들과 대화를 하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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