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3국 여행기

코카서스 3국(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여행 이야기(22)...아르메니아 어머니상과 2백만명의 학살사건 이야기

뿅망치 2024. 8. 19. 00:17

예레반에서 둘러 본 곳...대량학살 기념관을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우리가 에치미아진에서 출발하여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아르메니아의 어머니상(Mother Armenia Monument)이 있는 승리공원으

 이곳은 1930년대 후반에 아랍키르 도시 공원으로 시작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소련군의 승리를 기념

하여 "승리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며 높이 17m의 스탈린 동상을 세우고 1950년 11월 29일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의 일

원이 된 것 30주년을 맞아 정식 개장했다고 한다.

이후 1962년 스탈린 동상이 해체되었고 1967년 건축가 아라 하루투냔(Ara Harutyunyan)이 디자인한 아르메니아 어머니 기념비

를 새롭게 세웠고, 1970년 기념비 받침대 안에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애국전쟁 박물관을 열었으나 1995년에 국방부가 관리하는 마

더 아르메니아 군사 박물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례반 근처로 들어오고...

승리공원(Victory Park)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어머니상( Mother Armenia Monument) 승리공원은 2차 대전 때 소련이 독일에 승리

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어머니상은 스탈린의 동상이 있던 곳에 스탈린의 동상을 허물고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정면에서 보는 아르메니아의 어머니상 ...이 어머니상의 모델이 17세 소녀 제냐 무라디안(Genya Muradian)이라고 한다. 

어미니 상 앞에는 꺼지지 않는 평화의 불길이 타고 있다.

맞은 편에는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예레반 시내...예레반은 해발 1,000m 정도의 고도에 있는데 아나톨리아 고원의 동북쪽이다.

 

이곳은 예레반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해 있어 아르메니아 수도의 수호자처럼 보이는 아르메니아 어머니 기념비는 예레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념비 중 하나로, 아르메니아 어머니 기념비의 높이는 22m, 받침대를 포함한 기념물의 전체 높이는 51m. 동상은

망치로 두드린 구리로 만들어졌고 기념비 받침대 안의 박물관인 '마더 아르메니아 군사 박물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어머니 기념비는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힘을 통한 평화를 상징하며 어머니상이 들고 있는 칼끝은 역사적으

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학살을 저질렀던 튀르키예를 겨누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가거나 어떤 장소에 가서 그곳의 건물을 보거나 기념물을 볼 때는 최소한 그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 정

도는 생각해보는 것이 그곳을 방문하는 자의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곳의 아르메니아의 어머니상은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당하지 말자는 다짐 같

은 의미로 만들었을 것으로 동상이 들고 있는 칼끝이 아르메니아인을 200만명을 학살한 튀르키예쪽으로 향하게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상이 가지고 있는 칼의 끝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량학살의 범죄를 저지른 튀르키예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을 지키려는 의지가 서려있는 얼굴이고 학살에 대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얼굴이다.

아라라트 산은 아르메니아 대부분에서 다 보이는 산으로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1,000m 정도이기 때문이다.

기단 아래 돌은 화산석인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청동상은 구리를 망치질로 해서 만들었다고...내부는 전쟁관련 박물관이라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동상 아래는 전쟁 박물관이라고 한다.

동상 뒤에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우리는 시간도 없고 날씨가 더워서 곧바로 다음 관광지인  간다.

 

 

대량학살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약소국가로 주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으나 이슬람국가의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으면서 이슬람쪽인 아제르바

이잔과 튀르키예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는 오스만터키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200만 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서 가장 큰 대학살 중의 하나로 세계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지만 튀르키예는 그런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 사과도 없는 중이라고 한다.

 

예례반에는 Genocide memorial wall이 있는데 이때의 대량학살에 대한 기억하는 곳이다.

예레반의 Genocide memorial wall

그 곳에 있는 위령탑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오스만 제국 또는 튀르키예 정부가 오스

만 제국의 영토에 거주했던 소수 민족이자 변두리 지역에 거주하던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튀르키예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가 시행되면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두 번에 걸쳐서, 오스만 제국 내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역사적인 사실로 튀르키예 군대가  한밤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사건은 두 번에 걸쳐 벌어졌는데, 첫 번째는 압둘 하미드 2세 치세인 1894년에서 1896년에 걸쳐 행해진

집단학살 또는 습격이었다. 당시 이스탄불 등 서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전체 국토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집단학살됐

다.

 

두 번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에서 1916년에 걸쳐서 통일과 진보위원회(청년 투르크당) 정권에 의해 오래전부터 오스만

제국령의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살던 아르메니아인을 현재의 아르메니아지방으로 강제이주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

을 학살하였다. 이 학살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약 백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대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라고 하면 두

번째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둘러싸고 1923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성립한 튀르키예정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사건을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대전 중에 오스만 제국 전체에서 희생된 사람들 중에서 아르메니아 민족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집단학살을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집시들을 탄압한 홀로코스트와 같은 조직적 학살이었

다고 주장하면서, 오스만 제국에서 튀르키예에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튀르키예 국가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월 24일은 1915년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이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어서, 매년 튀르키예를 비판하는 국제

적인 캠페인이 행해지고 있다.

군인들에 의해서 학살된 희생자들

 

기왕 집단학살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 보자면..

 

박해 배경에는 오스만 제국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사회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농민들의 농촌 사회와, 이스탄불 등의 도시

에 거주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다. 후자는 무역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해 부유한 상인층을 형성했고, 건축가나

조폐관 등의 직무로 들어가면서 궁정·중앙 행정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았다.

 

19세기로 들어가면서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도 사이에 문제가 나타났다. 그러던 중 러시아 제국이 남

카프카스(코카서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를 점령했고, 1877년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대의 북동부를 점령하던 상황이 발생하면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러시아는 1878년의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 디야르바키르, 시바스 등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

의 아르메니아인 권리 향상을 목표로 한 개혁 실시를 약속했다. 이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령 내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 운동

이 시작됐고, 제국 밖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훈체크, 다시나쿠시툰(다시나크파) 등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목표로

삼은 정당이 결성됐다. 그들 중에서 일부는 제국에서 비밀 지부를 설립하고, 오스만 관리를 노린 폭탄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 점령지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무슬림 난민들로부터 기독교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 군대와 협력하면서 무슬림을 몰아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해 도시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과 튀르키예인·쿠르드

족 사이에서 적개심이 높아졌고 오스만 제국인의 무슬림들이 아르메니아인을 외국과 내통하고 테러를 벌이는 위험 분자로 보게

되었다.

 

제1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1894년, 아나톨리아 동부의 비틀리스 주에서 거주하던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오스만 정부는 군대

를 동원해 충돌을 진압했고, 2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 정당은 국제 사회에 호소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 제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1895년 1월 영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은 공동으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행정 개혁안을 제시

하고, 그 이행을 오스만 제국에 통보했다. 1896년에 아르메니아인 혁명 조직이 이스탄불의 오스만 은행을 습격·점령한 사건이 발

생했다. 결국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의 충돌이 다시 재연됐다.

 

제2차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연합국 측의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

령했다.

혼란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스만 제국령 동부 아나톨리아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

는 완전히 소멸됐다.

 

피해자 수

이 일련의 박해에 의해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의 수는 가장 적게 추산하는 튀르키예 측 집계에 따르면 20만 명이고, 제일 많게 추산

하는 아르메니아 측의 집계는 2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19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던 아르

메니아인 인구는 약 150만 명이라고 하는 통계가 있으며, 20년 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의 인구도 자연 증가와 유출에

따른 감소로 거의 같은 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이미 러시아령으로 도망친 자, 가톨릭교·개신교·이슬람교로 개종하여 강제 이

주의 대상에서 벗어난 자를 빼면 이중 상당수는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수는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라는 추정

도 있으며, 미국·유럽·일본 등의 일부 연구자들은 60만 명에서 80만 명 정도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문제의 영향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령으로 되어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 문제는 영토 문제를 내포하는 정치 문제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튀르키예 영토의 옛 아르메니아인의 거주

지역은 쿠르드인이 대부분 살고있는 쿠르디스탄의 한 부분으로서, 쿠르드족 문제도 관계있다. 그리고 2012년 1월 23일 프랑스 의

회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인 금지법"을 통과시키면서 양국간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튀르키예는 이에 정치, 군사 관계를 중단시

켰다.

.......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언제라도 우리가 힘이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에게 이런 집단학살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 평등도 좋지만 국가가 힘이 없으면 자유나 평등은 그냥 허공의 메아리가 되 버린다.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국가 안에게 개인들간의 사이에서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고 국가간에는 그런 것 없다.

오로지 힘만이 정의가 되는 것이 국제 관계이다.

 

아르메니아의 어머니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도 이런 상황을 언제라도 맞을 수 있다는 것과  국력과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그 어느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