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도 30일 배낭여행

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드30일 여행기(52)...카슈가르는 점심을 메론으로 떼울수도 있는 곳 그리고 역사속의 카슈가르와 향비

뿅망치 2025. 1. 10. 06:27

향비묘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와서 이드카 모스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보이는 거리 모습

낮에는 직사광선을 직접 맞으면...덥다.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있는데...올라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가 보다.

이드카 모스크 광장 주변

오른쪽에 한 무리의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다.

이드 카 모스크...이 곳의 모스크가 신장지역에서 제일 커서 신장지역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경로라고 우대를 해 준다....그러나 예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네 시에 문을

연다고 그래서 4시에 다시 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골목으로 계속 들어가면 올드시티가 나온다.

어제 저녁 야시장이 섰던 자리이다.

낮에도 장사를 한다.

황동 제품을 만드는 골목..

제품이 전시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고추이다...고추가 반가울 줄이야 

올드 시티의 일부로 사람들이 살지만 구경을 한다.

병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골목에서 우리 일행들을 수시로 만난다.

올드시티에는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 있는데 동문에 있는 조각상..악기를 파는 골목이라는 의미이다.

전통악기를 파는 가게.

앞에  보이는 양산을 사람들은 우리 일행들이다.

골목 골목에는 메론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인심도 좋아서 맛을 보라고 한 쪽씩 나누어 주기도... 하나에 8백원 정도로 하나를 사면 둘이 요기가 될 정도로 양도 푸짐하고 맛도

그만이다. 점심을 메론으로 떼웠다.

이렇게 달고 시원한 메론은 먹어 본 적이 없다....하나에 800백원 정도 둘이서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네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숙소로 돌아오고...앞에 있는 찻잔모양을 보아 차를 파는 집인 것 같으나 낡아보이는 것을 보아 장사

는 하지 않는 듯

한문으로 몽회객십(夢回喀什)...몽회라는 단어는 이곳 사람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고 객십은 카슈가르를 음역한 한자이다....

그런데 객자라는 한자가 가래를 토할 때 내는 소리이다...  쩝

간자체로 된 한문은 읽을 수가 없다...읽을 필요도 없지만 짜증이 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어제 저녁에 보았던 모자만드는 동상이다.

숙소에서...카슈가르 시 뒤로 산과 사막이 보인다....이곳이 오아시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향비 이야기에 대한 보충

 

아래는 카슈가르의 역사와 향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만...

 

아팍호자묘 향비묘 ::

 

카쉬시 동북쪽 5㎞ 거리에 있음이슬람교식 고대 건축물. 1640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693년에

완성됨.(300여년의 역사)

아팍호자는 17세기 카쉬가르 수피즘(백산당)의 대표자로 이 묘에는 그의 아버지를 비롯 5대에 걸친

 72명의 가족들이 매장되어 있음.

제 1대는 유숩호자이지만아들인 아팍호자가 더 유명하여 전체 능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움.

 또한 청조 말기 위구르족으로서 건륭제의 첩이었던 향비”(香妃)가 묻혔다는 전설에서 향비묘라고

도 불리움.

 

☞ 위구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시기가 있다.

 

하나는 카라한왕조(840-1230) 시기이고다른 하나는 얠캔칸국(1514-1678) 시기이다얠캔은 한

어로는 샤츠어(莎車).(현재 莎車縣  

위구르 사람들은 카라한조 시기를 위구르 문화의 제1전성기로얠캔칸국 시기를 제 2전성기라 부른

  

카라한왕조 시기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술탄 수툭 부그라칸이다.(존경받는 인물로서)

 

얠캔칸국 시기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팍호자이다.(악명 높은 인물로서)

 

위구르 사람들은 17세기 즉 얠캔칸국의 후반기를 수피즘의 세기라고 부른다왜냐하면 명목상 칸

이 존재했지만실질적인 권력은 호자라고 불리우는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종교귀족들이 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수피즘을 전도하기 위해 사마르칸드나 부하라 같은 곳에서 얠캔칸국으로 들어온

 종교집단에 불과했으나 점차 수피즘에 취한 얠캔칸국의 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집

단으로 변하여정권을 조종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수피즘 종교귀족들 즉 호자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였는데사람들은 그

것을 백산당’(白山黨)과 흑산당’(黑山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즉 백산당과 흑산당은 신강에서

이슬람교의 양대 주요 파벌이었던 것이다.

이 양대 파벌의 조종 하에 수도 얠캔과 지방정권 사이의 정권투쟁이 끊이질 않았고 그들의 정권다툼

 가운데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얠캔 칸국은 이 두 파벌의 상호 투쟁 중 멸망되었다.

 

이 얠캔칸국의 멸망을 초래한 인물이 바로 아팍호자이다.(카쉬가르의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그는

 나가던 위구르인의 얠캔칸국위구르 문화의 전성기를 망쳐놓은 몹쓸 수피놈...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 멸망 경위는 이러하다.

 

1667년 압달라칸이 사망하자 그의 큰 아들 욜바스가 백산당의 지지 아래 칸위를 계승했다그러나

 흑산당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욜바스의 동생 이스마일을 칸으로 등극시키려 하였다.

이 때 천산산맥 북쪽에는 서몽골인들이 다스리는 준가르국이 있었고천산산맥 남쪽(타림분지)에는

 얠캔칸국이 있었는데, 준가르국이 흑산당의 이스마일을 지지하면서 얠캔칸국의 정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벌써 외국국가가 정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만큼 국력이 약해진거지...)

그리하여 1670년 4월 2일 이스마일과 흑산당 수령들은 악수에서 출발카쉬가르로 진격해얠캔까

지 곧바로 쳐들어갔다.

(서몽골의 준가르국이 도와준 듯이스마일은 형으로부터 칸위를 빼앗고얠캔칸국의 새 군주가 되

었다.

그리고 곧바로 형을 지지했던 백산당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백산당의 수령 아팍호자는 간신히 카쉬가르를 탈출하여 인도를 거쳐 티벳으로 들어갔다그는

 라싸에서 달라이라마를 접견하고 달라이라마는 그에게 친필 서한을 주어 준가르의 지배자 갈단에

게 가보라고 하였다. 1678년 아팍호자는 준가르국으로 가서 갈단을 접견하였다.

갈단은 달라이 라마의 친필 서신을 본 후(이 때 서몽골은 티벳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달라이 라

마의 영향력이 컸음)

일 만여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얠캔칸국으로 진공하였다.

마침 칭기스칸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갈단에게 아팍호자의 지원 요청

은 천산산맥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하여 갈단은 1678아팍호자를 앞세우고 카쉬가르로 진격얠캔까지 점령해버렸다그는 이

스마일칸을 포로로 잡아 굴자(한어로는 이닝)로 보내 구금시켜버리고 그 대신 아팍호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

흑산당에게 쫓겨갔던 백산당이 다시 외세의 힘을 빌려 흑산당을 쫗아낸 것이다.(정권다툼에 이기려

고 외세를 끌어들인거지...망할려고 작정을 한거지 뭐..역사상 외세 끌어들여서 잘 된 나라를 못 봤

우리도 신라가 고구려 이기려고 당나라 끌여들였다가 당한테 먹힐뻔 했잖아...- -)

 

이렇게 해서 카쉬가리아(천산산맥 이남타림분지지금의 남강지역)는 다시 통일이 되었지만, ‘무슬

림 신권정치’ 아래에 새로운 몽골 제국인 준가르의 속국으로 전락, 150여 년간 지속된 얠캔칸국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라를 잃은 위구르인들은 그로부터 약 70년간 서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물론 아팍 호자와

그의 일족은 몽골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며 위구르인들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아팍 호자는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적을 거꾸러뜨리고 정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위구르인들

이 독립을 잃고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백산당과 흑산당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양측은 앞을 다투어 몽골 지배층

에게 잘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제압하려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 위구르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 그럼 향비는 누구인가?

 

향비는 아팍호자의 5대째 자손이다.(이 때 준가르는 청에 의해 멸망당하고준가르의 속국으로 아팍

호자 집안이 다르리고 있던 카쉬가리아 또한 청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카쉬가르 출신으로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건륭황제(1736-1795)의 명

으로 고향을 떠나 ()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1760),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한다.

(현지 위구르인 가이드는 좀 다르게 설명한다향비의 오빠와 삼촌이 건륭황제 때 청조에 큰 공을 세

워서-청조가 카쉬가리아를 점령할 때 별 저항을 안 했나부지 뭐..아팍호자 집안은 뭔가 매국노적인

 냄새가 난다...처음에는 아팍호자가 몽골을 끌어들이더니,

그 자손은 또 청을 끌어들인거잖아..- 건륭황제가 이 가족들을 모두 북경으로 초청했는데그 때 향

비의 미모가 건륭황제 눈에 띄여서 첩이 되었단다)

 

그녀는 카쉬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이 여인은 26살 때(1760)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망향병에 시달렸다는

 흔적도 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

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

)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향비의 실존 근거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

장상(香妃戎裝像)>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찬자불명(撰者不明글 쓴 이가

분명치 않음)의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회부(回部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

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

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쉬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향비는 그에 저

항한 여성인 셈이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청의 황제 건륭제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치 않고 저항한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

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그 욕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