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잘 살아가는 이야기

노노노노

뿅망치 2020. 7. 1. 23:30

노노노노라는 단어는 네 살배기 손녀가 거부의 의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oo아 밥 먹을래?’ 라든

가 무엇인가를 부탁했을 때 싫다는 표현으로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세워 귀엽게 흔들면서 노노노노

고 한다. 아마도 책에서나 어린이 영어 애니메이션에서 보았거나 했을 것이다.

 

어제 점심 때 집사람 친구가 놀러 와서 집에서 국수를 삶아 먹고 동네를 산책하기 전에 잠깐 남미여행을

하였던 사진을 보게 되었다. 2015.10.5.일부터 45일간 패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5개국

을 배낭여행을 7명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집사람 여자친구도 같이 갔었다.(집사람은 엄두를 못내

서 못갔음)

남자 3명과 여자 네 명으로 알음알음으로 해서 한 팀이 되어 여행을 했고, 카메라는 내가 유일하게 가지

고 가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와서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 사진은 여행기

를 쓸 때도 사용하였지만 대용량 외장하드에 저장하여 가끔 대형 TV(75인치)에서 보기도 한다.

같이 간 멤버였던 집사람 친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을 보니 그때의 기억과 감동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모양이다.

 

대부분이 풍경사진이지만 그 풍경 속에 자신의 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보면서 저 때는 아직도 봐줄 만 했

었구나 하면서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비교를 하면서 보면서 흘러가는 세월에 변해버린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란다.

지금 68세이고 그 당시가 63세였으니 60대에서 5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은 대단하다. 소파에 앉아서 감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니 턱의 볼살도 내려오고 입가에 주름이 많이 져서 그 때의 사진과 비교해 보니

너무나 많이 변했다. 그 때는 예쁘장한 얼굴이었었는데....늙어간다는 것을 정말로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늙어간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실감을 하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변해져 있는 얼굴을 보거나 아이들이 자라나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

하고 새삼스레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늙었음을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그때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늙었음을 지적하였더니 그대도 만만치 않게 늙었다고 응수를

하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얼굴에 주름이 별로 생기지 않는 체질이라 얼굴을 그리 많이 삭지 않았는

데 그 때 사진과 비교하여 앞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어느 누가 세월을 비켜 갈 수 있으랴....

 

언제 또 저런 여행을 할 수 있으려나 그때를 부러워하면서 더 늙기 전에 배낭여행을 해야 할 텐데 이젠

코로나가 발목을 잡는구나 하고, 세월의 너무 빨리 감과 더불어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

다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더 많은 곳을 여행을 했으면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이야기 하였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정말로 인생을 잘못 살아서 다시 되돌리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그

냥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면 또 그렇고 그런 인생을 두 번씩 되풀이하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40여 년이 넘는 종교인의 삶을 살아오다가 종교인의 삶을 청산한 입장에서 인간 개인 개인이 태어

나서 살아가고 죽는 과정에서 신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 입장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연의

법칙 속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것처럼, 인간 또한 그냥 자연법칙에 의해서 태어났다가 자연법칙에

의해서 살아가고 자연법칙에 의해서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경쟁을 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깐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종교의 인생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동양의 종교(불교, 힌두교)

인생관과 서양의 종교(기독교 이슬람교)의 인생관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내용을 일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불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도 잘 알지 못하며 생각해 본 적이 없

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전생의 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생에서 그 업장(業障)

을 소멸하기 위한 고행의 삶을 살면서 다시는 윤회의 굴레로 태어나지 않는 해탈의 길을 가야 한다.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에서 업장을 멸하는 삶 자체를 고통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

체가 불행이며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이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꼬하는 것이라고 한다

는데 이는 불교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그에 반해서 기독교에서의 인간의 태어남은 신의 축복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기쁨

이 무한한 것처럼 부모와 같은 신 곧 하나님도 인간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태어남은 축

복이라고 하며 신의 축복속에 살다가 죽어서는 다시 하나님 곁인 천국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태어남은 축복이고 기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조건으로는 죄가 없어야 한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다 같을진대 종교에 따라 인생관이 판이하게 다르니 두 종교의 인생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많이 햇갈리겠는가....

전생의 업장을 소멸시켜서 윤회를 하지 않는 삶을 살기도 불가능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방법도 없

어서 천국 가는 것도 불가능하니 차라리 이것저것 모르고 살거나 무시하고 사는 것이 맘이 편할 것이다.

 

나는 다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윤회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업장을 소멸하지도 못할 것이고 천국을 갈

수 있는 죄 없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니, 종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다시 사는 것이 의

미가 없을뿐더러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도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 과정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내 모습과 더 나은 삶을 살 자신도 없

고 죄의 유무와 업장의 소멸 유무를 떠나서 그렇게 후회하거나 바로 잡았으면 하는 내용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다시 살더라도 업장의 소멸의 소멸이나 죄없는 인간이 될 자신이 없고 기쁘고 즐거운 것보다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내용이 더 많은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데 왜 그런 삶을 다시 선택하겠는가......

그래서 네 살배기 손녀의 흉내를 내면서 노노노노라고 한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내가 남아 있는지 모르고 어떤 삶이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내게 다가오는 삶

에 순응하면서 그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나는 남아 있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을 세계의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사는 것으로 목표를 삼아서 힘

이 있는 한 여행을 하려고 하며, 설령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죽으니 행복한 죽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복상사(腹上死)만큼 행복한 죽음은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