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1.26일로 여행을 시작한지 18일째가 되는 날이다. 27일간의 여행기간 중에 2/3가 지나갔고 앞으로 봐야 할 곳도 나미
비아의 나미브 사막과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만 남았다.
보츠와나의 마운에서 나미비아의 빈트후크까지는 810㎞로 승용차로는 여덟 시간이 걸린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중간에서 쉬기도 하고 점심도 먹어야 하며 국경을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그보다 더 많이 걸린다.
보통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이 아닌 아프리카의 여행을 할 때는 동물과 폭포 케이프타운의 희망봉과 테이블 마운틴 을 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막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980만㎢) 사하라사막과 칼라하리 사막 나미브 사막이 있는데 사하라 사막은 지중해 연안에
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사하라 사막을 보기 위해서는 지중해 쪽에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남쪽의 대서양쪽에 위치한 칼라하리나 나미브 사막을 보기 위해서는 나미브 사막을 보기위해서는 나미비아를 반드시
들러야 한다.
칼라하리 사막은 모래사막이 아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찾지 않지만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은 붉은 사막으로 독특한 풍광 때
문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사막이 들어가는 투어라면 반드시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이 들어간다.
우리도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을 보기 위해서 나미비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나미브 사막을 가기 위해서 먼 길을 간다. 하루 구경을 하고 몇 백KM를 가고 또 하루 구경을 하고 몇 백KM를 가고 하는 일정이
다. 중간에서 쉬기도 하고 국경을 통과하느라고 지체를 하기는 했지만 열 두 시간이 걸려서 빈트후크의 숙소에 도착을 했다....
이제는 차를 타는데 이력이 나서 지루한 줄을 모르게 된다.
아침 여섯시가 되기 전에 기상하여 아침을 해 먹고 점심준비까지 하여 여섯 시 반에 출발을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아침을 먹
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충 준비를 해서 출발을 한다.
엊그제 마운으로 올 때와는 다르게 도로사정은 좋은데 길에는 로드킬을 당한 매들이 가끔 보인다.
이 매들은 로드킬을 당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기 위해서 길에 있다가 로드킬을 당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말자 유리창
에 무엇인가가 쿵 하고 부딪히는데 보니 매가 부딪혀서 튕겨 나가고 있다. 길에 죽은 동료들을 먹으러 내려오다가 우리 차량에
부딪힌 것이다.
보츠와나에서 나미비아로 가는 길에도 수시로 소나기가 내려서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내리기는 하지만 잠깐 내렸다가 금방 그치
는 비로 비의 양은 많지가 않으며 비가 그치면 고맙게도 무지개도 나타나준다.
새벽 같이 두 대의 차량으로 출발을 하는데 뒤에 트렁크를 싣는 트레일러를 달고 간다. 이 차를 나비비아에서 3일을 타고 다니
게 된다. 기사는 나비미아의 빈트후크에서 왔다고 한다.
몸이 안 좋은 우리팀의 최고참을 위해서 편안하게 가도록 이번 일행들이 배려를 해 주어서 이렇게 누워가게 되었다.
아침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면서 과일과 급조한 햄버거로 차 안에서 아침을 먹는다.
마운을 벗어나고...A3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간다.
길가에 가축들이 가끔 보이는데 길에 당나귀가 죽은 것도 보았고 매들이 많이 죽어 있는 것이 보인다.
비를 만나기도 하고.........비가 자주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심상치 않아 보이는 하늘...그러나 비는 더 오지 않고.
바가 그치자 무지개가 보인다.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은 비슷하기는 하나 조금씩 다르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닌 대부분의 땅들은 부시맨의 영화처럼
관목들이 있는 그런 곳으로 사자를 비롯해여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이 살고 있는 곳들이다.
몇 시간을 같은 풍경을 보면 지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은 풍경은 아니기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다.
도로 보수공사를 하는 사람들
이 나라는 주(州)경계를 통과할 때 신발들을 소독하고 농산물 등을 검사하는데 우리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곳의 법
이 이러니 따라야 한다.....방역 때문이라고..
스페어 신발도 소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풍경이 보이고...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다....출발한지 3시간 정도 지난 9. 30분 경이다.
차량에 주유를 하기 위해서 휴게소에 잠깐 쉬는 곳...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휴게소 다운 곳을 보는 것 같다.
잠시 쉬는 동안...빵을 김에 싸서도 먹어 본다.
마운으로 올 때 보다는 길이 준수하다.
수시로 가축들이 지나가고...주변에 목장들이 있을 듯...길가의 나무들을 보더라도 비가 제법 오는 지역인 것 같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가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이런 길이 지루한 사람은 배낭여행을 할 수가 없다.
나미비아의 빈트후크로 가는 도로의 표지판을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드는데...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이고 북한이 가로 막혀 있기 때문에 육로로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이런 간판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
다.
보츠와나와 나미비아에 부시맨인 코이산족이 사는데 이 근처에도 산다고 한다.
차창을 통해서 사진을 찍어서 잘 나오지는 않았지만 끝없는 평원에 펼쳐진 하늘과 구름이 참으로 아름답다.
산이 없는 스텝지역이기 때문에 땅도 360도가 다 보이고 하늘도 360도가 다 보인다.....사진은 일부분이기 때문에 실감이 전혀
나지 않는다.
어느덧 나미비아 국경 근처에 도달하고...국경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보인다. 이 때 시간이 12.10분으로 출발한지 6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이제 절반 정도를 온 셈이다.
아직도 한 시간 정도를 더 차를 타고 나서야 국경에 도착을 하였는데...그 사이 지가나는 주변의 사진들을 찍는다.
보츠와나 출입국 관리 사무소가 보인다.
7 시간이 지난 1시 반에야 나미비아 국경에 도착하였는데 비자를 발급 받는 동안 이곳 대기실에서 아침에 준비해온 점심을 먹
는다.
비자를 발급 받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통관과 비자 발급이 일찍 끝났고 우
리가 타고 왔던 차를 그대로 타고 나미비아로 간다.
마운에서 출발할 때 나미비아에서 차량과 운전수가 왔기 때문에 운전수가 같은 나라 사람이어서인지 가방 같은 것도 그리 어렵
지 않게 통과시켜 준다. 캐냐에서 탄자니아로 갈 때는 무척 까다로워서 가방을 다 까뒤집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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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는 2017년도 일인당 명목상 소득인 GDP가 7,674달러로 세계 79위이고 구매력기준인 GNI는 13,910달러로 세계에서
45인 나라이나 이 나라도 소득 불균형이 심각하여 상위그룹과 하위그룹의 소득격차가 43배가 난다고 한다.
아래는 보츠와나에 대한 나무백과의 글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읽어 보시도록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나라. 보츠와나는 "츠와나 족의 땅"이라는 뜻의 츠와나어 단어다.[2] 그리고 내전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수도는 가보로네(Gaborone)[3]. 국토면적 58만 2,000㎢로 남한 면적의 약 5.8배이며 프랑스 본토보다도 약간 크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인구는 많지 않아 약 200만 명 정도이다. 때문에 인구 밀도도 km²당 3.4명 정도로 매우 낮은 편이다.
국토 전체가 해발 1,000m 가량의 고지대이나 평탄하다. 국토의 서부 대부분은 칼라하리[4] 사막이 뒤덮고 있고 인구는 남아공
과의 접경지대인 남동부에 집중되어있다. 사실 츠와나인 자체가 보츠와나보다 남동쪽의 남아공(400만 명)에 더 많이 거주하고
있기도 하다. 국토의 가운데에 마카디카디(Makgadikgadi) 분지가 있고 북쪽의 오카방고 강 삼각주에는 사막 한가운데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보츠와나 국기...하늘색은 물과 비(보츠와나의 표어, 츠와나어로 "Pula")를, 하얀색과 검은색은 인종의 화합과 국장에 그려져 있
는 얼룩말을 의미한다.
보츠와나 국장...톱니바퀴는 산업을, 세 개의 물결 무늬는 물과 보츠와나의 나라 표어인 "비" ("Pula")를 의미하며, 황소의 머리는
목축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방패 양쪽에는 두 마리의 얼룩말이 그려져 있으며, 왼쪽에는 상아를, 오른쪽에는 사탕수수 이삭을 감싸고 있다.
얼룩말은 보츠와나의 야생 동물을 의미하며, 상아는 과거 보츠와나의 상아 무역을 의미한다.
사탕수수는 보츠와나의 대표적인 생산물이다.
방패 아래쪽에 있는 리본에는 보츠와나의 나라 표어인 "비" ("Pula") 라는 문구가 츠와나어로 쓰여져 있다.
보츠와나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한 민족은 부시맨으로 알려진 코이산족이었으며, 17세기에 지금의 남아공 지역에서 반투족의
일파인 츠와나족이 이주해 왔으며 여러 부족 국가가 생겼다. 보츠와나 지역은 내륙의 사막 지역이었으나, 19세기 중후반 보어
인들이 금을 찾아 보츠와나 일대로 침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츠와나족 추장들의 요청으로 보츠와나 지역
은 1885년 보어인과 옆동네 나미비아에서 세력을 넓히던 독일을 견제하려 했던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영국은 보츠
와나 지역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말 그대로 보호령인 상태가 유지되었으나, 세실 로즈가 남아프리카 회사를 설립하고 남아
프리카 지역 전체를 직접 통치하려 하면서 이런 상황에 위기가 왔다. 츠와나족의 세 추장은 1895년 영국으로 건너가 보츠와나
를 식민지로 만들지 말라고 요구했고, 결국 보츠와나는 완전히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세실 로즈가 계획한 케이프 식민지와
로디지아를 잇는 철도가 보츠와나에 부설되었다. 다만 보츠와나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던 영국은 보츠와나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치해서 철도 외에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고, 보츠와나인을 남아공의 광산에 노동자로 보내기만 했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 설립 이후 남서아프리카가 남아프리카에 편입되자, 남아프리카 정부는 내친김에 보츠와나 역시 남아
프리카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였다. 남아프리카는 영국 정부와의 협상을 지속하였지만 남아프리카 국민당 집권 이후 양국의 사
이가 틀어지면서 결국 물 건너가 버렸다.
1966년 보츠와나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세레체 카마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츠와나족의 망과토 부족의 추장의 후계
자였으나, 백인과 결혼했다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이었던 남아프리카 연방의 반대로 인해 보츠와나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이
에 대한 반발이 이어지면서 1956년 카마는 보츠와나에 일반인 자격으로 귀국이 허락되었다. 세레체 카마는 보츠와나 민주당을
창당하고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66년 보츠와나는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보츠와나가 독립한 1966년 당시 보츠와나의 1인
당 GDP는 70$로 남한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전 국토에 포장도로라곤 8km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립 직
후인 1967년부터 다수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 채굴이 시작되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고, 구리 등 다른 지하자원의 개발도 진
행하면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2010년 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은 PPP 기준 15,180달러로 10,518달러를 기록한 남아
공보다 높았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해 소수만 부를 누릴 뿐이다.[5]
정치적으론 민주주의 국가로, 아프리카 대륙에선 독립 이래 민주주의를 계속 유지한 극히 드문 케이스의 나라이다. 초대 대통령
이었던 세레체 카마가 개도국 지도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독재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다만 내용상으로 보면 지금도 집권 세
력이 늘 이긴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6]
보츠와나 민주당이 독립 직후 총선에선 80.4%를 득표하며 대승했고, 21세기 들어서도 득표율은 과반수 조금 넘는 수준까지 줄
었으나 아직은 건재한 편이다. 언젠간 정권교체 되긋지 특히 소선거구제의 힘을 입어 57석 의석 중 45석이나 가지고 있다.
2014년 총선에서도 45석으로(기존 44석, 일부 의원들이 탈당해서 그렇다.) 여전히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NGO 기관인 세계 사법정의 프로젝트에 의하면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법치가 잘 이루어지며, 세계에서도 99개
국 중 25번째라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조사하는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도 2017년 기준 28위를 기록해 29위인 프랑스
나 33위인 대만보다도 오히려 높게 평가받았다. 아프리카 국가 중 더 높은 순위를 기록한 나라는 16위의 모리셔스와 23위의 카
보베르데뿐이었다.
때문인지 영 상태가 좋지 않은 옆나라 짐바브웨에서 넘어오는 사람도 많다. 이에 보츠와나 정부는 가축 전염병 방지 명목으로
짐바브웨 경계선에 철책을 두르기도...
1966년 독립 당시에는 군대가 없는 나라였으나, 이후 백인 정권 치하의 로디지아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군대가 게릴라
잡겠다고 자꾸 국경을 넘어와 깽판을 쳐서 그런지 1977년 군대를 창설하게 된다.
여기도 에이즈가 창궐하는 곳이라 세계에서 평균 수명이 짧은 편이긴 하지만 타 아프리카 국가보다는 평균 수명이 좀 길다.
2006년 기준으로 전 인구의 36%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다고 하며 평균 수명은 50세 정도(UN 2005-2010) 혹은 60세 정도(CIA
자료). 이것도 2000년경 40세 미만으로 떨어졌던 시절보단 호전된 것이다. 경제사정이 그나마 좋다고 말하기도 좀 그런게, 빈부
격차가 세계적인 수준이라서 국민 대다수에겐 별로 좋을 것도 없다. 당장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격차가 43배에 달한다.
물론 129배에 달하는 옆나라에 비하면 참으로 평등하다. 정확히 3배 차이 난다
인구의 80% 가량을 츠와나족이 차지하여 다른 아프리카 나라보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민족갈등요소가 적다. 특이한 점으로는
츠와나족은 보츠와나보다는 이웃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더 많은 수가 살고 있다. 츠와나족 외에 부시맨으로 알려져 있는 산족이
이 나라에 조금 살고 있는데 보츠와나에서는 바사르와(Basarwa)[7]라고 부른다. 인구에서의 비중은 3% 정도로 인구 절대다수가
츠와나족인 보츠와나에서는 소수민족. 문제는 산족 거주 지역이 다이아몬드 산지였던 것이다. 보츠와나 정부는 1990년대부터
자연 보호를 명목으로 산족의 생업인 사냥을 금지하고 산족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심지어 경찰이 산족들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3분의 2 가량이 강제이주당한 산족은 보츠와나 정부에 소송을 걸었으나 기각당하자 다시 소송을 걸었다. 결국 2006년 보츠와
나 법원이 보츠와나 정부의 산족 강제이주는 불법이라 판결내렸고 산족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보
츠와나 정부는 보호구역 내에 우물을 파는 것도 물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도 가축을 기르는 것도 수렵을 하는 것도 모두 금지
해 실질적으로는 산족이 돌아올 길을 봉쇄했다.
한국과는 보츠와나가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지 3년 뒤인 1968년 4월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북한과는 1974년 12월에 수
교하면서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되었으나 북한의 인권유린을 이유로 2014년 2월 단교하면서 # 오오 개념국가 오오 남한 단독
수교국이 되었다. 이에 대해 2014년 10월. 주 유엔 북한대표부는 주 유엔 보츠와나대표부에 검둥이(black bastard)!!!라고 폭언
하는 막장스러움을 과시했다. 그 후, 한국과 정상회담에서 북한과는 관계를 유지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북한 지도부에 대해
석기시대에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당할 망신도 없다 2016년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하자 보츠와나의 마시시 부통령이 UN
총회에서 북한은 UN 회원국 자격이 없다고 연설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네갈, 스와질란드, 레소토, 라이베리아와 함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한국인이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6개국들 중 하나다. 원래는 비자를 발급 받아야만 갈 수 있었는데 2009년에 보츠와나 정부가 자국의 국립공원 야생동
물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고자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한국인에 대한 비자 입국 조치를 폐지하고 무비자 입국으로 전
환했다고 한다. 체류기간은 9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