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 럽 3개국 체코 오스트리아 헝거리

동유럽 3국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을 다녀오다(4)..프라하의 존 레논 벽과 프라하

뿅망치 2023. 7. 9. 06:08

프라하에 도착한 시간이 11시로 오늘 중에 프라하의 중요한 관광지를 다 보아야 한다고 한다.

역사가 1천년이 넘는 도시를 한나절에 둘러본다는 것이 언어도단이지만 패키지 관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 그르려니 할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관광지..그리고 쇼핑도 해야 하고....

야갼의 프라하 성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게 되면 나라가 합병과 분리가 수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서양사나 기독

교 교회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도시의 역사와 도시를 지배했던 국가나 사람들을 알고자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동유럽의 지리적 조건을 생각해본다면 동유럽의 도시들이나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다.

교통의 요충지나 물산이 풍부한 곳은 언제나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라하도 그런 운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르게 되었으며 그러나 다행하게도 건물들은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해서 많이 보존이

되고 있다고 한다.

카를교 근처의 프라하에 도착을 하자 현지 가이드가 나와서 오늘 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주의사항을 전달해 준다....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최강의 가이드였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했었다.

대기하는 중에 주변을 둘러보고....퇴적층이 세로로 서 있다.....나는 지질쪽에 관심이 있어서 유심히 보는 편이다.

레논 벽을 가는 도중에 보이는 공원

프라하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간 곳은 프라하 성아래 있는 레논 벽이다.

이 벽은 그냥 작은 광장에 있던 벽으로 옆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성당과 광장을 구분하기 위해 세운 벽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 비틀즈의 존 레논이 암살당했을 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화가와 음악인들이 프라하에 있는

벽에 초상화와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그리면서 이후 이 벽은 존 레논, 평화, 서구 문화, 정치 투쟁 등과 관련된 주제의 그림들로 장

식되기 시작했으며 존 레논의 얼굴과 존 레논의 곡 가사를 그려놨다고 한다.

 

그후 1989년부터 민주화 열풍이 불면서 시위대의 집결지가 필요했는데 그곳이 바로 레논의 벽이었다고 한다. 이후 민주화 시위가

성공을 하고 나서도 레논벽은 그대로 존재하게 되고 프라하의 관광자원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한다.

 

존 레논 벽을 보고는 카를교를 건너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레논 벽으로 가는 길의 풍경

 

지도를 보니 앞에 보이는 조각이 있는 공원은  클라포프공원이다....쓸데 없지만

어린아이들이 야외학습을 나왔는지 트렘을 기다리고 있다...어린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즐거운 에너지를 준다.

레넌 벽으로 걸어가고....레논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카를교 밑은 지나간다.

존 레논 벽

프라하를 들린 사람들은 이곳에서 인증샷을 반드시 찍는 곳이라고 한다.

모든 관광객이 낙서를 할 수 있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벽 뒤쪽은 천주교 성당으로 아마 그래서 이 벽이 남아 있게 되었을 것이다....예전에는 정치적인 구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존 레논

에 대한 내용들만 있다고 한다.

모스코바의 아르바트 거리의 통곡의 벽에 있는 빅토르 최의 사진...러시아 당국에서 낙서를 지우면 다시 쓰고 한다고...

이곳도 존 레논 벽과 비슷한 의미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존 레논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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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체코의 프라하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나무위키에서 설명한 중의 일부를 인용해 왔다.

읽어 보실 분은 읽어 보시도록

키를교와 프라하 성

 

프라하는 중부유럽에 위치한 도시로 체코의 수도이다.

북위 50°, 동경 14°28'. 면적은 496 평방킬로미터, 인구는 2022년 기준 127만 5406명이다. 프라하의 1인당 GDP는 2021년 63,309

달러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유럽 선진국들 부럽지 않은 수준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체코 전체의 1인당 GDP는

2019년 IMF 통계 기준 23,495달러(세계 39위)로, 프라하로 경제력이 집중되고 있어서 지역 간 경제 불균형 현상이 심하다.

 

체히 지방의 중심부에 있으며, 블타바 강[1]이 중심을 가로질러 흐른다. 스트르셰도체스키 주가 프라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행정 관청 또한 프라하에 위치한다. 프라하 시의 중심지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가장 중세 유럽이나 19세기 유럽의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도시를 자처하고 있다. 가장 그러한지는 취향 차가 있겠지만 중후한

근대 유럽풍이 아주 잘 보존된 도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럴 만도 한 게 동유럽의 다른 도시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화로 피해를

입은 경우가 많다.

 

특히 이웃 국가 폴란드의 바르샤바는 전쟁 기간 동안 나치의 만행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에 반해 프라하와 체코 지역은 바이

에른과 더불어 서방 연합군과 소련이 독일 본토로 진입하는 와중에도 가장 마지막에 수복되다 보니 다행히도 전쟁의 참화를 비껴

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꼭두각시와 공동묘지로 유명하다. 베네치아, 부다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온 동네에 꼭 꼭두각시 극장이 있다. 또한 옛 건

축물 구석구석에 메멘토 모리의 심볼(해골, 시계, 연금술 문장 등)이 숨겨져 있다. 프라하에 가면 점성술사의 시계탑을 꼭 볼 것.

구시가 광장과 마리아 성모 교회

 

처음 9세기에 프라하 성이 축조되었고,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현재의 구 시가지의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면서 블타바 강의

나루터의 취락에서 교역 도시로 발전했고, 1085년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4세기에 이르자 카렐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도시는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의 인구는 4만으로 추정된

다. 그 사이인 1344년에 주교구에서 대주교구로 승격되었고, 1346년엔 카렐 4세의 통치 아래 룩셈부르크 왕조 치하 신성 로마 제

국 전체의 수도가 되었으며 1348년엔 프라하 카렐 대학교[2]가 건립되었다.

 

그러다가 1378년 얀 후스의 종교 개혁으로 14~15세기에는 후스 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이후 보헤미아 왕위가 합스부르크 가문

에 넘어가면서 빈, 포조니[3]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주요 세 도시 중 하나로 등극했다.

15세기~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하였으나 1583년 루돌프 2세의 통치 아래 잠시나마

두 번째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유럽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신교의 자유를 두고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으로 1618년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프라하 성

에서 황제의 대리인들을 투척하면서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4]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에 육박했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대의 공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과 함께 그 수도가 되었다. 1968년의 프라하의 봄 사건으로 유명하며, 1993년 슬로바키아의 분리

에 따라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자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불타바강가 다리들...사람들이 많이 있는 다리가 카를교이다.

 

https://youtu.be/WrqGeMTiYJ8...프라하 소개 유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