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산을 출발한지 1시간 반정도 지나서 구마모또에 도착했고 구마모또 성으로 구경을 하러 갔다.
구마모토성(熊本城)은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로 진격했던 왜장 중의 한 사람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가 1607년에 축성한 성으로 나고야 성 오사카 성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중의 하나라고 한다.
당시의 구마모또 성 모형
이성은 장기 농성에 대비하기 위해서 은행나무를 많이 심고 다다미도 고구마 줄기로 만들었다고 하며 주위 5.3 킬로미터의 성내에 120여개의 우물을 팠고, 성루 49 개소, 성루문 18개소, 성문 29개소의 건조물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천수각(天守閣)도 그 때 소실되었으나 천수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이 성은 벚꽃의 명소로서도 알려져 있어 일본 벚꽃 명소100선에 선정되고 있다고...
(참고로 서남전쟁은 일본의 최후의 대규모 내전으로 수만명이 내전으로 죽었고 사무라이시대가 사라진 전쟁이라고 하며 ‘라스트 사무라이’나 ‘쇼군’ ‘바람의 검심’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전쟁이라고 한다.)
누각은 아주 높고 축대 또한 높아서 공격하기는 힘들고 방어하기는 쉽게 되어 있다. 이 성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방에서는 그냥 높은 누각이 있는 성(城)일 뿐이나 서남전쟁 때 정부군과 반란군이 57일간 공방을 벌였으나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고 한다.
구마코또 성 입구
해자
왕소군의 그림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길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갑옷
성 안에는 성과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있는 방이 있는데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이 말을 타고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가는 그림이 있는 방이다.
참고로 왕소군은 양귀비 서시 초선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이다.
이 성에 왕소군의 그림이 있게 된 것은 성주였던 가토기요사마(가등청정)이 자신의 주군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하며 쇼군(장군(將軍)과 왕소군의 소군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소군의 그림이 있는 방과 천정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4시 경으로 성을 구경하고 나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 패한 백제 사람들이 와서 세운 국지성 등을 보는 일정이 잡혀 있어서 성의 구석구석을 보지 못하고 천수각에 올라가서 경내와 구마모토 시내를 둘러보고는 다시 차를 타고 백제인들이 와서 쌓은 성터인 국지성으로 갔다.
구마모토는 백제가 멸망하면서 망명한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을 하여 살았기 때문에 백제의 유적지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한 참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여섯시가 되었는데 성터에는 목탑과 백제 옷을 입은 청동조각 동상과 몇 채의 건물들이 성터에 남아 있고 주춧돌 자국들만 보인다.
이곳에 일본천황이 직접 와서 기념식수(紀念植樹)를 하였다고 하며 천황이 기념식수를 한 것은 이곳이 자신들의 조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숙소로 향했는데 이곳 국지성 말고도 백제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국지성으로 가는 길에 길가에 핀 꽃
국지성 터
백제인 동상
성의 언덕에서 보이는 정경
군데 군데 주춧돌들이 보인다.
참고로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본래 일본열도에 살고 있던 아이누족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어 홋카이도 등에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의 천황가(天皇家)는 가야와 신라와 백제의 왕가(王家)의 혈통이 이어진 것이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만 하지 않을 뿐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가야 사람들부터 건너가기 시작했으며 고구려 신라 백제 사람들이 건너갔는데 이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낯설고 물 설은 땅에 그냥 갈리는 없을 것으로 권력의 투쟁에서 또는 나라가 멸망함으로 인해서 일본 땅으로 간 사람들로 본래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인 한반도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애증(愛憎)의 땅이 되는 셈이다.
장자에 의해서 고향에 쫓겨난 차자는 자신이 살던 고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을 쫓아낸 형을 미워할 수밖에 없으며 다시 고향에 돌아올 때는 금의환향의 심정과 원한을 풀고자 하는 심정을 동시에 지니는 것처럼,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유전자 속에 한반도를 미워하는 마음과 한반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
유대인과 아람인의 조상이 같지만 적자(嫡子)와 서자(庶子)의 갈등으로 인해서 종교가 달라지고 원수의 관계가 되었던 것처럼 한국과 일본도 지금은 그런 관계처럼 되어 있지만 고대사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원수처럼 지내게 될 것인지 형제처럼 지내게 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묵을 기꾸까온천호텔 화부정(花富亭)은 일본관광객들에 의해 수질이 규슈제일로 선정된 노천탕을 보유한 곳이라고 한다.
2008년도에도 후꾸오까에 왔을 때 이곳에 묵은 적이 있었는데 온천을 하면서 경치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저녁은 온천호텔에서 제공된 일본정통요리인 가이세키요리를 먹었는데 일본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참으로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저녁이 일본에서 잠을 자는 마지막 저녁이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나서 큰 방에 같이 모여서 본래 여행의 목적인 육순과 칠순 기념 파티를 조촐하게 하였다.
하루종일 관광하느라 지친 일행들 도착한 시간이 일곱시가 넘었다.
저녁식사..일본은 어디서나 일인 일상이다.
화갑과 칠순의 조촐한 축하파티 고깔을 쓴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시누이와 올케 사이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마을을 바라보며 온천을 하고 아침을 먹고는 여관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저번에 보았던 풍경 그대로이며 야외에 있는 족욕탕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아침 식사 또한 정갈하다.
야외에 있는 족욕탕... 6년전 그대로이다.
여관 주변
안에 있는 목욕탕에서 보이는 바깥풍경화부정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
목욕탕에서 보면 이런 풍경이 보인다. 출발하기 전에 일부러 찍은 사진
내부
출발하는 우리들에게 정성껏 배웅을 해 준다.....정말 진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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