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울란바통 초원을 보러가다

내몽골 울란부통 초원을 보러가다.(20)....북경으로 출발을 하다....또 열하일기 이야기

뿅망치 2025. 8. 11. 13:25

적봉역에 도착하니 12시다.

북경까지는 410km로 고속철도로 두 시간 반이 걸린다.

올 때는 북경에서 저녁에 출발을 하는 바람에 바깥 경치를 보지 못했었는데 오늘은 12시 50분에 출발을 하기 때문에 바깥을 볼 수가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기차역으로 들어갈 때는 짐도 검사하고 소지품도 검사를 한다.

중국은 기차를 탈 때는 이렇게 하지만 티켓 검사도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기만 하다.

410km로 두시간 반이 걸린다.

출입국 수속을 하는 것처럼 통과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

인민을 위한 철도라는 글자...인민과 국민...인민이 국민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선점하여 쓰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부

정적인 이미지의 단어이기도 하다.

이곳에 올 때는 밤이어서 주변을 둘러볼 시간도 없었는데...이곳도 북경만큼이나 넓다.

벽에 있는 그림들...울란부통의 풍경들이다.

우리가 보았던 옥룡사호의 그림도

석림의 곤붕사진도

대합실 저 문으로 기차를 타러 간다.

 

내가 여행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A에서 B로 이동하는 것으로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시로 변하는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미에 갔을 때는 바릴로체라는 도시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길을 24시간을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그 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층 버스 앞자리에서 누워갈 수도 있는데 앞과 옆으 경치를 놓은 위치에서 볼 수도 있고 밤에는 밤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어서 특별했던 기

억이다.

차 안에 화장실도 있고 논 스톱으로 목적지까지 단다...2층 앞좌석은 비행기 조종석 같아서 경치를 180도를 감상할 수 있다.

 

적봉에서 북경까지 가는 길은 특별한 풍경은 없고 비슷한 풍경이 지나가가고 중간에 몇 번의 정차가 있었지만 금방 출발을 한다.

지나가는 중에 지금은 승덕(承德 청더)이라는 도시를 지나게 되는데 청나라 시절에는 열하(熱河)라고 불렸던 곳이다.

지난 번에도 열하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이 이름은 조선말기의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때문이다.

이곳도 아파트가 우리나라 만큼  많이 지어지고 있는 중이다....적봉

기차 옆의 들판들

방풍림도 잘 조성이 되어 있고

도시들이 가끔 지나간다.

곡식이 심어진 들판이 또 나오고...채소인 것 같기도 ...계절상 푸른 곡식은 없는 계절이기도 하다.

북경까지 가는 동안 네 번 정차를 한다는데  첫번째 정차역인 우성이라는 곳이다.....출발한지 30분 정도

멀리 있는 산이 

가까이 오고.. 이제 산 사이로 지나간다.

기존의 철로인 듯

적봉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정도 지나고...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산이 많아지고 높아진다.

이곳이 열하 승덕이라는 도시로 적봉과 북경사이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승덕 역

 

열하는 베이징(北京)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180㎞ 떨어져 있다. 또 롼허강(灤河)의 작은 지류인 러허강[熱河]에 면해 있다. '뜨거운 강'이란

뜻의 러허 강은 청더(承德) 위쪽에서 이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개의 온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도시의 명칭에도 붙여지게 되었다. 1700년

대 초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는 이곳에 여름 관저를 짓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뒤 황제가 매년 여름에 베이징을 떠

나 청더에 머무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다음백과)

 

연암박지원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허생전이나 호질 등 같은 소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열하일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은 1780(정조4년) 청나라의 건륭제의 칠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수행관 자격으로 이곳에 다녀온 경험을 열하일기(熱河日

記)라는 여행기를 썼다. 그는 1780년 8월 1일 한양을 출발하여 의주, 압록상을 건너 봉황성, 심양, 산해관 북경을 거쳐 8월 31일 열하에 도

착을 했고, 9월 초순까지 머문 후에 북경 심양 역주를 거처 10월에 귀국을 했다.

 

내용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

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

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고전소설 <호질>(호랑이가 꾸짖다)을 써서 지배계급인 양반들의 위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비판

하는 풍자를 하기도 했다.

 

평가

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의 필사본은 아홉 종.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를 보여준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

을 섞어 쓰거나 청나라 여행에 나선 사절들을 돕는 하인들이 한 농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다.

당대에 '점잖은 글'이랍시고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

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뿐 아니라 문체나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열하일기》는 당대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조가 패관잡기(패

관은 패관문학이라고 하여 길거리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글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문학의 갈래로 존중받지만, 조선시대 지배계급 지식인들은

그들이 보기에 허황된 이야기인 소설을 길거리, 저잣거리 이야기, 잡스러운 이야기라고 비판한 것이다.)를 불온시하며 순정문(부드럽고 올바

르게 고친 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문체반정의 서곡을 올린 중심에도 《열하일기》가 있었다. 정조는 직접 하교까지 내려서

박지원의 문장을 저속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정조는 문체가 나빠진 까닭이 박지원의 《열하일기》탓이라며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요즘 문풍이 이따위로 된 것은 박 아무개의 죄가 아닌 것이 없다. 《열하일기》는 과인도 벌써 익숙하게 읽어봤는데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것인가?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하더니 문체가 이 따위로 변했다. 마땅히 사고를 친 자가 해결해야 할 것이다. 속히 한 가지 순정한 글

을 지어 곧바로 올려보내어 《열하일기》의 죄를 속죄한다면, 비록 남행(南行)의 글이라 한들 어찌 아까울 것이 있으랴?

 

정조의 이같은 호령에 박지원은 변명이라고 격식을 잔뜩 갖춘 속죄문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는데, 이 글이 또 보기 드문 명문이라서 정조가

또 웃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지 약 80년이 지난 뒤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

다.

오늘날 《열하일기》는 학술 서적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왕조 일대를 통하여 수

많은 ‘연행문학’(북경 사신 및 그 일행이 사신행을 하면서 지은 문학)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점하는 책이다. 실학의 대표학자로 박

지원은 중국의 문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앞선 기술을 배우고 선진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다(위키백과)

북경 근처...적봉으로 갈 때는 보지 못한 경치들이다.

북경 외곽

북경에 도착을 하고...

 

여행 상품 중에는 북경과 열하(熱河)를 구경하는 상품이 있기는 하더만 옛날에 북경을 보았기 때문에 열하만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오기는

어렵다.

북경에 도착을 하니 세 시 반으로 남은 일정은 북경 올림픽 기념관으로 가서 구경을 하고 쇼핑을 하는 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