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귀에서 하룻밤을 자고 능귀에서는 다른 일정이 없이 버스를 타고 스톤타운으로 가서 배를 타고 다르에스살람으로 가서 잠비
아의 루사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다.
10시 경에 스톤타운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해서 해변으로 나갔는데 어제보다는 물결이 조금 더 일어나 보인다.
바닷가에서 해변쪽...이름이 거창한 월드 와이드 슈퍼마켓이 보이는 골목이다.
이른 아침이라서 골목에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바닷물이 기둥 아래까지 들어와 있다.
아직 아무도 없는 해변
갈 수 있는데 까지 걸어가 보기로 하고....다른 일행들도 나와 있다.
숙소쪽 해변
물이 들어왔다가 썰물 때가 되어 빠지는 중이다.
어제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레스토랑의 테라스 기둥의 바닥도 다 물에 잠겼다.
숙소로 돌아오고...
이 숙소가 폐업이 되었다고....
숙소 뒤의 아름다운 길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쉬고 있다....아침은 숙소에서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준다.
스톤타운으로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바다를 보러 가는데 웰컴 어게인이라는 글귀가 보인다....그러나 이곳을 다시 오겠는가
바닷가의 풍경을 사진에 더 담아보고...
출발하기 전에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주고...꽃모자를 쓰고 있는 주인공
열시가 다 되어서 스톤타운으로 출발을 하여 스톤타운에 도착을 하니 11시 정도가 되었다.
어제 보았던 학교...여자아이들은 히잡을 썼다.
사진을 찍는 줄 알고 손도 흔들어주고...이 아이들이 커서 행복한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달구지에 장작을 싣고 오는 시골길...
스톤타운으로 쪽으로 들어고오...
잘가꾸어진 공원도 보인다.
우리가 오던 날부터 보았던 포로다니 공원이다.
오전의 포로다니 공원은 한가하다.
그늘에만 사람들이 좀있을 뿐...
스톤타운으로 돌아온 시간이 11시 정도로 오후에 잔지바르에서 배를 타고 본토인 다르에스살람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잠비
아의 루사카로 가야 한다.
스톤타운 숙소 근처에 중국식당이 있어서 면 종류를 사 먹으로 갔더니 이때가 마침 정전이라서 어둡고 더워서 안에서 식사를
할 수가 없다.
중국집 두 군데를 들러 보았으나 맘에 들지 않아서 포르다니 공원으로 나오는데 엊그제 만났던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자초지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곳의 음식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 면을 사먹으려고 한다고 하니 바로 근처에 일본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우동을 판다고 한다.
친절하게도 직접 그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갔는데 그곳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지만 2층이어 바람이 불어서 덥지는 않다. 그런데
오늘은 우동을 팔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음식점을 찾기도 힘들고 덥기도 하여 아무거나 점심을 해결하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의논한 끝에 결정한 것
이 포르다니 공원 바로 앞에 있는 술탄왕국의 포르다니 궁전으로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다
오며 가며 보았던 포로다니 궁전 박물관
잔지바르는 오만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왕자들 간의 투쟁으로 1861년에 오만으로부터 분리독립되었으며, 1964년에 탄자니아에
합병되기까지 100여 년간 독립된 왕국으로 존재하면서 왕이 살았던 곳이다.
오만에서 이곳으로 궁전을 옮긴 세이드 사이드 술탄을 비롯해서 이곳 왕들의 초상화들이 있고 그들의 생활했던 공간이나 도구
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층에서 보면 포르다니 공원과 인도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인다.
2층에서 보면 궁정의 한 쪽에 이곳의 통치자들과 가족들의 묘지가 있는 것이 보인다.
사라져 버린 왕국이 되어 버렸으니 누가 찾아오기나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이드 사이드 술탄의 초상화로 오만에 있는 궁전을 잔지바르로 옮긴 왕이다.
주마간산으로 둘러보느라고 누군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름답게 생긴 부인의 초상화...아마도 훈자을 달고 있는 사람의 부인이 아닐까...
해안을 지키는 대포도 있고...
상아는 무슨 의미인지...
응접실
회의실??
2층에서 본 포로다니 해안...보이는 바다는 인도양이다.
무덤들...왕이거나 왕족이었을 것일 터...관광객들 말고 지금 누가 이곳에 와서 무덤을 둘러보겠는가....
우리가 들른 잔지바르와 스톤타운은 노예와 노예무역을 빼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 비참한 역
사를 알아보고 가는 것이 여행자의 도리라고 생각되어 찾아 보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아메리카대륙으로 팔려간 노예들은 서쪽 해안에서, 아시아와 아랍으로 팔려간 노예들은 동쪽해안에서 매
매가 되었는데 잔지바르는 동쪽해안의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오만제국은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곳이고 그 장소가 바로 잔
지바르이다.
그 중심지역이 우리가 머물러 있었던 스톤타운으로 이곳에 노예무역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었는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는 못했다.
인간이 인간을 매래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노예와 같은 종들은 전쟁을 통해서 또
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있어 왔으며 우리나라도 엄연히 구한말까지 노예와 같은 종(從)이 있었으니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
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프리카의 노예들은 서양의 사람들이 총을 들고 아프리카를 누비며 노예들을 잡아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
실은 아프리카인들이 자기들 부족을 팔아먹기도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서양이나 아랍에 팔았다
고 한다.
잡아 오는 과정이나 매매가 되는 과정 그리고 운송되는 과정들에서 인간은 고사하고 짐승만도 못한 단순한 상품으로서의 가치
로만 거래되는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잔지바르는 그 현장이었던 것이고....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나 생각하겠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서 ‘인간이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를 생각해보는 것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봐야 할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슬레이브 마켓이라는 간판이..인터넷에서
흑인들을 끌고 가는 사진..인터넷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장치들..코도 뚫어 놓고 목에도 나무를 걸어놓고 손도 묶어놓고..
물건을 싣듯 실어 나르니 죽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도망가다가 잡히면 머리에 이런 무거운 나무 도막을 엊어 놓았다고 한다.
노예무역 폐지 엠블럼...
노예매매장소가 있던 곳에 세워진 성공회 성당의 마당에 있는 노예상...이 쇠사슬은 실지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아래는 나무위키에 있는 내용이다. 가능하면 꼭 읽어보시길.
노예무역의 역사
노예무역의 시작은 이미 그 역사를 정확히 알기 힘들 정도로 오래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고 하는데, 전쟁이라는
사회적 힘의 불균형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계층이며 노예이다.
우리가 아는 노예무역은 통상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는 아프리카계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노예무역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노예무역이 세계적으로 활발해지는 시점은 대항해시대와 관련이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인들과 교역을 했으며 이 때
처음으로 노예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허용되었으나, 유럽권은 그렇지 않았다. 기독
교(가톨릭+개신교)에서 반인륜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를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되면 만사형통'이라
는 포르투갈인들은 노예무역을 시작한다. 아프리카 왕국들 중에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통해 머스킷과 같은 총을 얻은 곳이 있었
는데, 이것이 그들의 세력 확장 및 유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총을 얻기 위해서 자국인(自國人)을 노예로 제공한다. 어차피
유럽인이 가장 큰 고객이었기에 아프리카 왕국들에게도 나쁜 거래가 아니었다.
따라서 노예사냥 하면 생각나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흑인들을 납치하는 유럽인의 이미지는 전형적이지 않다. 실제로는 아프리
카 현지의 강한 부족이나 국가가 약소한 주변 부족을 공격한 후 거주민을 유럽인에게 노예로 팔아치운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다.
초창기에는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무역은 대등한 관계였다 해도 아프리카인들이 수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포르
투갈인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많은 노예를 자꾸 요구하게 되자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인
들은 안정적인 노예공급을 위해 이들을 정벌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정복지를 개척해 통치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오
늘날의 앙골라다. 중계상에서 완전한 공급자로 변신한 것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예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노예에 대한 수요는 대항해시대에 스페인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커졌다. 이 때 아메리카 원주민
들을 주요 노동력으로 현지조달해서 노예화 했는데 이들이 쉽게 쓰러졌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이에 대해 원주민들이 매우 약해
빠진 인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데, 실제로는 과도한 노동과 유럽인들이 가져 온 병균으로 인해 많이 죽었다고 한다. 총,
균, 쇠에 있는 내용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노다지를 앞에 두고 노동력 부족으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올인한 유럽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노예무역이 활성화된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0,000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아프리카를 떠났고 약 10,700,000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
다.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도 다른 곳으로 팔려갔지만, 항해 도중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노예들이 많다. 노예문서에는 노예선이
노예들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보여주는 사진이 있는데 인간으로는 커녕 생명체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상품
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적재'한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렇게 미친 듯 노예를 쓰게 되는 것은 바로 돈 때문이다.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큰 액수이기는 하
다. 예컨대 프랑스령 아이티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크게 있었는데, 이것이 프랑스 재정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나라
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조그마한 땅에서 그 정도의 수익을 거두었다. 아이티는 면적이 2만 8천 제곱
킬로미터 밖에 안 되었는데도, 프랑스가 아이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정글까지 다 없애면서 사탕수수 농장을 확보했으며
아이티가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무려 70만 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이티의 환경은 답이 없
는 수준이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못 사는 나라들이 아프리카에 가장 많은 편인데, 역사적으로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가 엄청난
대륙과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노동력은 매우 부족하다.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 인구가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18세기
아프리카 인구가 6천 만명에 불과했다.
아프리카보단 유럽에 인구소국들이 많은데[물론 아프리카 대륙 자체가 북쪽은 사막이고, 남쪽은 열대 기후,정글이 많고 각종 위
험한 전염병과 맹수들까지 많아서 원래 인구가 희박하긴 했다. 지금은 그나마 높은 출산율 덕분에 많이 늘어난 거다. 물론 이외
에도 아프리카를 식민화 한 유럽국가들이 세계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면서 부족문화와 정서 등을 고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그려 놓은 경계선별로 식민지를 독립시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담으로 이 시
기 아프리카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거의 모든 형이 노예형으로 바뀌었으며 온갓 사소한 범죄에도 노예형이 내려졌다고
한다.[물론 당연히 팔아먹으려고.]
노예무역의 영향
노예무역은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강제적이고 비인도적인 이주를 당한 아프리카인의 후손들은 우리가 듣는 재즈,
힙합, 랩, 탱고, 보사노바, 레게 등 아프리카계 문화의 세계화를 이끌어냈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가운데 그나마 버티게 해준 애
환이 담긴 노동가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 역사적으로도 여러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우리는 흔히 노예무역하면 대서양 노예무역만을 생각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알고 보면 아랍 쪽도 은근 많이 했다. 무려 900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수가 적게는 400만에서 많게는
1800만에 이른다 하며 플랜테이션 농장에서의 노가다로 노예들을 끌고간 유럽이나 아메리카쪽 국가들과는 달리 아랍 국가들
은 주로 노예 군인 맘루크나 하렘에서의 성노예로 쓰기 위해 노예들을 끌고 갔다. 이 때문에 대서양 노예무역에서는 남자와 여
자의 비가 2대1이라고 하나, 아랍 쪽 노예무역에서는 그 반대라고 한다. 또한 만쭈리의 블로그의 노예무역 파트를 보면 아랍은
잔지바르 섬에 본부를 두고 주로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흑인들을 끌고 가 노예로 삼았는데 이런게 수백 년이나 계속되어서 아랍
의 노예상들이 쓰던 아랍어와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언어가 합쳐져서 스와힐리어라는 피진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날 스와힐
리어는 케냐,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 등 동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공용어로 널리 쓰인다. 또한 아랍 국가들은 20세기 초
까지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 그런 오늘날 아랍 국가들에서는 미국이나 브라질이나 쿠바 등과 달리 흑인 들을 보기가 어려운
데, 왜냐하면 남성 노예들은 모두 거세당했고, 여성 노예들은 출산을 하면 그 아이는 그 즉시 살해되어서 씨를 못남겼기 때문이
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이 사라진 뒤에는 아예 아프리카 현지에서 땅콩이나 카카오 등의 작물들을 노예들을 활용해 플
렌테이션 농법으로 재배한뒤 서양에 수출하는 체계가 생기게 됐고, 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노예의 수가 이전보다 엄청 늘어
났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에 비해서 불법적으로 부려지는 노예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아무튼 노예 무역은 지금은 법적으로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단에서는 이슬람교도가 기독교도를 납치해서 노예로 삼는 등 아
직도 꽤 막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