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우티에서 점심을 먹고 지프자와 이별을 한 뒤 승합차로 갈아타서 카트만두로 출발을 한 시간이 두 시 반이다.
가는 길에 쉬바(Shiva) 상이 있는 상가(Sanga)라는 곳에 들러서 구경을 하고 가게 되는데 힌두교에서 시바신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신으로 힌두교 신의 서열 중에 가장 높은 신이다.
힌두교에서는 수십만의 신이 있지만 그중에 중요한 3 신이 있는데 첫 번째 신으로 천지를 창조한 브라흐마(Brahama), 두 번째 신
으로 세상의 도덕적 위계질서인 다르마(Dhama)를 수호하고, 균형과 유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비쉬뉴(Vishnu), 세 번째 신으로 파
괴의 신이자 해체의 신으로 힌두교에서 파괴 혹은 죽음 또는 재창조의 신인 쉬바(Shiva)가 있다.
힌두교인들은 브라흐마나 비쉬뉴보다 죽음의 신인 시바신을 많이 섬기기 때문에 브라흐마와 비쉬뉴보다는 시바의 상들이 많이 보
인다.
이곳에 있는 시바신상은 높이가 43.5m로 구리, 아연, 콘크리트 및 강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며 시바신상으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고 한다.
상가라는 곳에서 내려서 시바신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입장료가 있다.
이 소는 시바가 타고 다니는 '난디'라는 황소로 힌두교인들이 소를 신성시하여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이다.
시바의 부인 파르바티와 두 아들...오른쪽의 코끼리머리를 한 아들은 가네쉬로 시바가 목을 쳐서 죽였다가 부인의 살려내라고 강
짜를 부리는 바람에 코끼리 머리를 잘라서 붙였다고 한다.
시바 신상..높이가 42미터라고 한다.
시바신상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카트만두쪽이다.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신상이 있는 밖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어느나라나 관광지에 있는 가게
붉은 안료는 식용이 아니고 얼굴에 바르는 것인 듯
기나가는 길가의 가게들...드나드는 문에서 멀어질 수록 사람들이 없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아래서 기다리는 승합차를 타코 카트만두로 간다.
건너펀 경치
출렁다리...
출렁다리에서 본 카트만두쪽
건너편에 시바신상이 보인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고 이다리가 무서워서 못건너는 사람도 있고...
출렁다리도 건너고...
무종교인이나 타종교인들은 힌두교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신상에 대해서서 그냥 높다거나 크다거나 하는 느낌밖에는 없는데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기념사진 한 번 찍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곳에는 시바가 타고 다니는 난디 라는 소와 시바의 두 아들과 그의 부인 파르바티 등의 동상이 같이 있지만 누구인지 왜 소가 그
곳에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보고 오는 것이 여행자의 기본 자세로 그곳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
고 어떻게 사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를 알아야만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 것이 보이게 되는데 그런 기본적인
개념들을 별로 장착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카트만두에 도착을 하여 맛사지를 하는 곳으로 간다....계획에 없던 행사로 50여만원의 비용이 추가되었다.
자전거 인력거가 줄서 있는 곳도 보이고
거리풍경들
마사지샾 마당...
시바 상을 구경하고 카트만두에 들러서 저녁을 먹기 전에 마사지 하는 곳에 들러서 맛사지를 하고 식사를 하였는데 벌써 현지식을
힘들어해서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한식당에 들러서 한식으로 된장찌개를 먹었다.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호텔 근처에 있는 한식당
본래 계획으로는 저녁에 더르바르광장에 들러서 야시장을 구경하기로 하였으나 피곤하기 때문에 야시장구경은 다음에 하기로 하
고 호텔에 들른다.
내일은 포카라로 가는 날로 포카라는 네팔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일 뿐 아니라 안나푸르나 등반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
야 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도시이다.
포카라를 비행기로 가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보는 히말라야 산맥의 경치에 대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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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힌두교의 중효한 신들과 힌두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힌두교는 인도와 네팔 그리고 동남아에 널리 퍼져 있어서 인도나 네팔에서 보는 사찰은 대부분이 힌두교 사찰이며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도 힌두교 사원이다.
그리고 동남아 여행을 하다가 보면 길거리에 원숭이 모습이나 코끼리 모습을 한 신상들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신
들은 힌두교와 관련된 신들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도 다 알지 못하는데 남의 종교까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75억 중에서 힌두교
를 믿는 사람들이 9억 명이나 되니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기 때문에 상식적인 선에서라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도와 네팔은 힌두교 국가이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사상이 힌두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를 기본적으로
라도 알고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며 그들의 종교를 알지 못하고는 그들의 문화와 삶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까막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책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므로 인도를 갈 때 힌두교를 모르고 간다면 타지마할 영묘를 보는 것 말고는 인도에 가는 의미가 없다.
힌두교는 역사도 길고 갈래도 많아서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힌두교는 언제 생겨났는지를 알 수 없으며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간략하여 설명한다면 힌두교에는 중요한 세 신(trimurti)이 있는데
첫째는 브라흐마(Brahma)로 창조의 신이요,
둘째는 쉬바(Shiva)로 파괴의 신이요,
셋째는 비쉬누(Vishinu)로 보존의 신이다. 이 세신 중에 하나를 믿고 헌신하게 되는데 대부분 시바신과 비쉬누 신을 믿는다.
힌두교에는 사성제도가 있는데
첫째는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브라만,
둘째는 무사 계급에 속하는 크샤트리야,
셋째는 상공인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바이샤,
넷째는 단순 노동자 계급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슈드라 이다.
그 밑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른바 불가촉 천민(不可觸 賤民)이 있다.
이 네 계급이 각각 신의 입. 팔. 넓적다리. 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태어난 계급에 맞는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거기에 따른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생에서 자신의 계급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더 위의 계급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힌두교에서는 삶의 목적을 첫째는 즐거움, 둘째는 재산, 셋째는 의무, 넷째는 목샤(해탈)이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시바신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생각하는데 시바신은 링감이라고 하는 남근으로 상징을 하며 힌두교 사원의 중심
에는 시바의 남근인 링감(Linggam)과 결합된 시바의 부인의 삭티의 여근인 요니(Yoni)가 결합상을 모셔 두고 있다. 링감
(Linggam)은 영원한 생명력의 싹으로 해석이 된다고 하니 링감과 요니의 결합은 우주의 양적 에너지와 음적 에너지가 결합으
로 생명의 잉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힌두교 사원이나 길거리 같은 곳에도 링감과 요니의 결합된 조각들이 있어서 공물을 드리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힌두교 사원에 있는 링감과 요니
시바의 얼굴을 하고 있는 링감
링감과 요니 맷돌처럼 생겼다.
캄보디아의 끄발스티언의 개울 안에 있는 링감과 요니
이 곳에 링가를 새겨 놓은 것은 이 계곡의 물이 흘러서 시엠리프 강을 거쳐서 톤레 삽으로 들어가기 때문으로 링가와 결합해
서 성수(聖水)가 물로 도시와 사람들이 신의 은총과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강의 원류가 되는 계곡에 새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이 세신 말고도 시바신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비슈누의 부인도 같이 섬기는데 중요한 신들은 다음과 같다.
힌두교의 중요한 신
1. 브라흐마(Brahama): 시간과 공간,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우주의 창조라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지만, 그를 숭배하는 사
원은 찾기힘들다. 그것은 이미 우주는 창조되어 있기에 유지와 해체가 우선시되어 비쉬뉴와 쉬바가 더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이며, 창조물의 신으로도 불린다. 4개의 머리와 4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4개의
팔은 카스트의 네 계급을 상징한다. 지식과 지혜의 상징인 거위 (백조)인 함사(항사 Hamsa))를 타고 다닌다. 그의 아내는 사라
스바티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
브라흐마의 부인 사라스와티(Saraswati) - 지식과 학문의 여신으로 아름다움의 표상이기도 하다
2. 비쉬뉴(Vishnu)는 세상의 도덕적 위계질서인 다르마(Dhama)를 수호하고, 균형과 유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비쉬뉴는 신과 인
류를 보호하는 존재이다. 비쉬뉴는 우주적 질서가 위협 받을 때 마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이름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
타난다. 그는 화신, 즉 아바타(Avatar)로 부활하는 신이다. 비슈누의 잘 알려진 10개의 화신이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화신들이
있다.
첫 번째는 물고기로 현신한 마트스야,
두 번째는 거북이로 현신한 쿠르마,
세 번째는 멧돼지로 현신한 바라하,
네 번째는 사자인간으로 현신한 나라싱하,
다섯 번째는 난쟁이로 현신한 바마나,
여섯 번째는 도끼를 든 이로 현신한 파라슈라마,
일곱 번째는 라마,
여덞 번째는 크리슈나,
아홉 번째는 깨달은 인간 붓다,
열 번째는 미래의 구세주 칼키이다.
비슈누는 네게의 팔을 가진 검은색 얼굴의 신으로 나타난다. 한손에는 철퇴(지식), 두 번째 손에는 소라고둥(생명의 근원), 세 번
째 손에는 악마를 물리치는 원반. 네 번째 손에는 연꽃(정결함과 평화)을 들고 있다. 그는 얼굴은 독수리,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가루다(Garuda)를 타고 다닌다. 그의 아내는 락슈미(Laksmi)로 행운과 미의 여신이자 부와 풍요의 여신이다.
보존의 신 비슈누
락슈미(Lak-shmi)
행운과 번영, 풍요의 여신으로 비슈누신의 아내. 상징은 연꽃(padma 파드마)이다.
또한 인도여성들이 많이 숭배하는 신이다. (인도여성들은 락슈미를 이상적인 여인상이라 생각.)
불교에선 [[길상천]](吉祥天)이라 불린다.
비슈누가 여러 화신으로 변할 때마다 자신도 화신으로 변해서 따라다닌다.
주로 붉은 연꽃 위에 서있고 양 옆에 두마리의 코끼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
성수를 부어주는 자세로 묘사된다.
3) 쉬바(Shiva): 힌두교의 세 번째 신이며 파괴의 신이자 해체의 신으로 힌두교에서 파괴 혹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형태로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파괴자로서의 쉬바는 실제로는 재 창조자인 셈이다. 쉬바는 수도승이자 요기들의 신이기도 하며,
바람과 폭풍우의 신이며, 사냥과 낚시의 신이다. 쉬바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몸에는 호랑이 가죽
을 걸치고, 목에는 해골목걸이를 하고 다니며, 머리에는 코르바를 두르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신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쉬바는 만물을 파괴하고 창조하는 위력을 가졌음으로, 모든 신들의 힘을 합쳐도 그를 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신이다.
쉬바는 단순하게 파괴만을 하는 신이 아니라, 파괴를 함으로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이므로, 현생에서의 삶이 아니라, 다음
생의 삶을 위한 숭배와 위대한 신으로 경배를 받으면서도, 가장 천한 계층의 사람들과 스스름 없이 사귀며 스스로를 낮추는 모
습으로 나타난다. 쉬바는 여러 명의 아내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딸 우마, 산의 딸 파르바티, 공포의 어두운 여신 칼
리, 삭티 등이 있다. w그가 주로 머물고 수행하는 곳은 카알라스(Kailrasa)산이었고, 흰소 난디(Nandi)를 타고 다녔다. 쉬바는 화
장터에서 구한 시신의 재를 발라 거무스름한 피부와 네 개의 팔과 이마에 제3의 눈을 가졌다.
파괴와 재창조의 신 시바
두르가 (Durga) - 시바의 아내
여러 이름을 갖고 있으며 두르가(Durga), 칼리(Kali), 파르바티(Parvati), 우마(Uma) 등은 으로 불린다. 파르바티나 우마로 불릴
때, 그녀는 사랑이 풍부한 어머니상의 여신이 되지만, 두르가나 칼리가 되면, 파괴의 두려운 여신이 된다. 특히 칼리의 사원에는
제물로서 동물이 바쳐지기 때문에 피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두르가는 파르바티의 화신이다. 두르가는 힌두 여성 신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르가는 여덟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손에 들고 있는 게 다르다. 그러나 삼지창, 칼, 방패, 뱀, 방울, 북, 컵,활, 화살, 바퀴, 소라, 곤봉 , 물
주전자 중에서 골라 들고 있다. 두르가는 요가를 하는 자세로 두 겹으로 된 연꽃 위에 앉아 있거나 호랑이나 사자 등에 앉 아
있다.
두르가는 파르바티와 달리 쉬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인도인들은 현세에서는 물질적인 이익을
얻 고, 내세에서는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르가를 숭배한다. 두르가는 아홉 형상으로 나타나는
데 그 모두가 숭배의 대상이다.
시바의 두 번째 부인 드루가
시바의 또 다른 부인 파르바티...파르바티는 명목상으로는 파괴 · 회춘 · 변형의 신인 시바의 두 번째 배우자이다. 그러나 파르바
티는 시바의 첫 번째 배우자인 사티(Satī)가 재화신 또는 윤회한 것이기 때문에 사티와 파르바티는 사실상 동일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파르바티는 힌두교의 남신들 중 가네샤(Ganesha)와 스칸다(Skanda)의 어머니이다
샤티의 화신인 파르바티
인드라(Indra): 천둥, 번개를 이용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농경의 신, 머리가 세 개 달린 코끼리인 아이바라타를 타고 다닌다. 아
리아인 침공 이전에는 신들의 왕이었으나, 삼신이 도입되면서 지위가 떨어지는데, 비쉬뉴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자신에게 충성
을 명세할 것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신들의 대장으로 여기졌다. 불교에서는 제석천이라 불렀다.
야마(Yama): 불교에서는 염마(염라대왕)이라고 불리는 그는, 천당과 지옥으로 가는 인간들의 심판자인 다르마라자이며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다. 물소를 탄다.
가네샤(Ganesha): 사람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를 하고 있는 쉬바와 파르바티의 첫아들이다.
아버지가 외출에서 다녀와 아내 파르바티를 찾는데 가네샤는 목욕을 할테니 아무도 집안에 들이지 말라는 어머니의 지시로 아
버지마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쉬바에 의해 머리를 잘린다. 아들의 머리가 잘린 것을 보고 놀란 부인 파르바티의 절규에 자
신의 실수를깨닫고 근처를 지나가는 코끼리의 머리를 잘라 몸에 붙임으로서 코끼리 머리에 인간의 몸이 되었다.
생쥐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니는, 지혜의 신으로 사업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가네샤는 재물과 행운을과 학문의 신이기 때문에 상점이나 길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신상이다.
하누만 (Hanuman) - 시바와 파르바티의 아들
원숭이 신 하누만은 가네쉬만큼 대중적인 신이다. 인도 전역에 걸쳐 숭배되고 있으며, 특히 농촌에서 그 정도가 심하다. 하누만
의 여러 모습으로 보여지지만 대체적으로 원숭이 머리와 잘 다져진 몸과 두 팔과 머리 위까지 꼬부러진 긴 꼬리를 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팔을 열 개까지 가진 모습도 있으며, 머리가 다섯개인 모습도 있다. 다섯개의 머리가 달릴 때는 각각의 머리는 원숭
이 , 독수리, 멧돼지, 말,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는 비쉬누의 대표적인 화신의 형상을 뜻한다.
라마를 도와 마왕 라바나를 물리치고 시타를 구하는데 일조를 한 하누만은 모든 악을 물리친다고 여겨지고 있다. 라마 사원이
나 비쉬누 사원에는 하누만이 빠지지 않는다. 또한 인도인들은 서유기의 손오공을 하누만이라 부른다.
하누만....힌두교 사원에서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신상이다.
위의 힌두교 신상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면 될 것이다.
번개를 들고 있는 신은 재우스이고 삼지창을 들고 있는 신은 포세이돈이며 방패를 들고 있는 신은 아테네 불수레를 타고 화살
을 들고 있는 것은 아폴론 등 등....
이 정도만 알아 두어도 인도나 네팔 동남아를 여행을 갔을 때 비로소 눈에 모든 것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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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자신을 중산층 내지 지성인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한다면 읽어보시길....
흰두교
‘힌두’라는 말은 ‘인도’라는 말과 같다. 지금 인더스 강 지역을 옛날에 ‘신두(sindhu)'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인디아. 인더스. 힌두
등의 말이 파생했다. 힌두교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통적 종교만을
일컬어 힌두교라 하고 영어로는 Hindhuism이라 표기한다. 지금 인도인 80% 이상이 따르며, 네팔인 거의 전부가 힌두교인이다.
그 외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북아메리카 등 인도인이 이주해 사는 곳에도 힌두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창시자가 없다. 이 말은 힌두교가 현존하는 세계 종교 중에 가장 오래되고 복잡한 종교라는 뜻이
다. 힌두교 전통은 여려 층으로 이루어졌고, 각각은 어느 면에서 완전히 다른 가르침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크게 다르
다. 따라서 서양 학자들 중에는 Hindhuism 이라는 단수형 대신에 Hindhuisms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힌두교 전
통에는 세계 여러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 거의 다 포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적으로 다양한 요소가
공존한다. 여기서는 그 다양한 요소를 따라가면서 특히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면을 검토하기로 한다.
힌두교의 기원
인더스 계곡 문명과 그 종교
기원전 3000~2000년경 인도 서북쪽에 있는 인더스 강 연안 계곡에 소규모 도시 국가가 상당수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1920
년대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도시 국가 가운데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가장 중요하여, 이 문명을 모헨조
다로 혹은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한다.
이 문명은 세계 최초로 계획에 의해 형성된 도시 국가였다. 아직 해독은 되지 않았지만 250여 개 정도의 문자와 톱 같은 연장
도 사용했고, 가축을 기르고 수로를 통한 관개 시설도 갖추었으며, 공중목욕탕이나 불로 구워 낸 벽돌로 공공 건물도 지었다.
학자들은 이 문명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버금가거나 더 우수한 문명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유물 중에 종교성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가슴과 엉덩이가 큰 여인상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으
로 농사의 풍성한 결실을 비는 풍요의 여신을 숭배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힌두교에서 가장 널리 숭배되는
쉬바 신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새겨진 점토판도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인도철학의 대가인 독일 학자 짐머에 따르면, 인더스 계곡 문명이 힌두교 전통에 공헌한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주를 음양
으로 보았을 때 음에 해당하는 여성성 혹은 창조성(힌디어로 샥티)을 강조한 것과, 둘째로는 만물이 한 번 죽는 데서 끝나는 것
이 아니고 계속 돌고 돈다고 보는 윤회 사상을 남겨준 것이라고 한다.
고전 힌두교
『리그베다』
기원전 15세기경, 지금의 이란쯤에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아리안족이 인도 서북쪽을 침공해와 인더스 문명을 굴복시키고 아리
안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인도로 침공해 온 아리안족은 신에게 드리는 예배 의식을 위해 여러 노래를 지어 부르고 나중 이
를 모아 『베다』 라고 했다.
‘베다Veda'라는 말은 ’앎‘이라는 뜻이다.
『베다』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리그베다』(찬송의 베다). 『아주르베다』(제문의 베다). 『싸마 베다』(예식의 베다). 『아타르바 베
다』(주술의 베다)이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이 『리그 베다』이다. 여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리그 베다』는 1,000여 개의 송가나 시편으로 이루어졌다.
힌두교에서 종교 문헌을 슈루티와 스므르티로 양분하는데, 슈루티는 ‘들은 것’이라는 뜻으로 신이 직접 말해 주었다는 것이고,
스므르티는 ‘기억한 것’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저술한 것을 의미한다.
전통 신앙에 의하면 『리그 베다』‘슈루티’로서 창세 이전에 신들이 ‘들려준’ 게시라고 한다. 종교 학자들은 기원전 15세기 전후
에 아리안족의 종교 제의를 위해 지어진 노래 모음으로 본다.
『리그 베다』에 나타난 종교 사상은 종교학의 창시자이자 『리그 베다』의 전문가였던 막스 뮐러에 따르면 ‘자연 숭배’라 할 수 있
다. 여기서 ‘자연’은 물론 지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이 아니라, 고대인 나름대로 어떤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느낀
대상물이라는 뜻이다. 거기에는 대략 76개의 대상물이 등장하는데, 이런 것은 의인화되고 신격화되어 찬양과 기도의 대상이 된
다. 태양이 태양의 신 수리야가 되고, 불이 불의 신 아그니가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신은 폭풍의 신 ‘인드라’였다. 그에게 바치는 노래가 『리그 베다』에서 250개나 될 정도이다. ‘인드
라’라고 하니 1984년에 암살당한 인디라 간디 수상을 생각해서 여성 신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이 신은 남성 신이다. 인드라는
혼돈을 상징하는 용 브리트라가 세상의 물을 다 마시고 내놓지 않을 때, 천둥 번개를 무기 삼아서 그를 무찔러 죽이고 물로 가
득한 그의 배를 터뜨려서 세상에 물을 돌려준 용감하고 고마운 신이다.
인도에 가본 사람은 그 더운 곳에서 폭풍이나 소나기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인도를 둘러보고 난 후
이런 것을 가져다주는 인드라가 당연히 중요한 신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리그 베다』에서는 여러 신을 숭배하므로 다신론이랄 수 있지만, 가만히 보면 그 신들 중 어느 한 신을 가장 중요한 주
신(主神)으로 받들어 모시는 셈이다.. 막스 뮐러는 『리그 베다』에서처럼 많은 신을 인정하되 그 중 어느 한 신을 골라 섬기는 신
앙 형태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henotheism'이라는 특수 용어를 만들었는데, ’단일신론‘이라 번역한다.
다신론이 여러 신을 두루 섬기는 것인 데 비하여 단일신론은 그 중 어느 한 신을 택해 특별히 경배하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유일신론이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로지 한 신만을 경배하는 데 비하여 단일신론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한 신을 경배하는 점이 다르다.
『리그 베다』에 나오는 찬송과 기도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주로 건강, 장수, 부귀다남, 풍작, 전쟁 승리 등 현실적 번영을 희구하
고 있다. 이런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신들에게 기도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파니샤드』
기원전 10세기경 베다 후기에 새로 생겨난 문헌으로 『브라마나스』가 있다. 이 문헌은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이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사 요람(祭祀 要覽)’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종교 형식은 물론 제사인데 그 중에 많은 말(馬)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도 있었다.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해가 뜨지도 못할 것이고 주장할 정도로 제사만 잘 지내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후 기원전 9~7세기에 『우파니샤드』라는 문헌이 생겼다. ‘우파'는 ’가까이‘ ’니‘는 ’경건하게‘ ’샤드‘는 ’앉다‘를 의미한다. 따라
서 ’우파니샤드‘란 학생이 스승 가까이에 경건히 앉아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찾아 서로 대화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우파니샤드』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인도 종교사에서, 어쩌면 세계 종교사에서, 최초로 대화체로 된 문헌이라는 점과 대
화를 이끄는 스승은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뿐 아니라 무사 계급에 속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을 가진 문헌이 약 200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13개 정도이다. 『챤도기야 우파니샤드』처럼
무척 긴 것도 있고 『케나 우파니샤드』처럼 한 페이지가 안 될 정도로 짧은 것도 있다.
독일 철학자로서 힌도교와 불교 사상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사람 중 쇼팬하우어는(1788-1860) “『우파니샤드』를 공부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답고 우리를 고양해 주는 공부는 온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극찬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리그 베다』에서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기도’가 중요시되고 『브라마나스』에서는 ‘제사’가 중요시 된 데 반해, 『우파니샤드』에서는 ‘이해’ 혹은 ‘깨달
음’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우주의 궁극 실재인 ‘브라흐만梵’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도대체 무엇인가? 브라흐만은 ‘네티 네티(neti-neti)라고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이니‘라는 뜻이다.
브라흐만은 도저히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에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 하는 것은 결국 그 절대적인 것을 제약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어느 범주로도 제
약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절대적인 것을 두고 ‘이것이다.’ 하면 그 순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은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범주를 초월하므로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무엇으로 표현된 절대자는 이미 진
정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 여러 종교들에서는 절대자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한다. 절대자에 대해 이런 태도
를 취하는 신학을 서양 신학사에서는 ‘부정의 신학(negative thology)’이라 한다.
한 편 그 절대적인 브라흐만은 단순히 추상적인 원리만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본질이며 참된 자아(아트만) 자체다. 나 자신은 바로 그 브라흐만이 구체화딘 상태로서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
이를 산스크리크어로 ‘탓트밤아시(tat vam asi)'리고 표현하는데 “그대는 바로 그것(브라흐만)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문으로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이렇게 내가 곧 브라흐만이요, 브라흐만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명(無明)이요, 이를 몸소 체득해서 깨닫는 것이
바로 목샤(해탈)라고 본다.
『마누 법도론』
이제 인도 종교사에서 경전을 신의 직접적인 계시(슈루티)로 보는 시대는 지나고 종교적 고전(스므르티)이 나타나는 시대에 들
어온다.
이렇게 새로이 고전으로 나타난 문헌 중에 기원전 3세기~기원 후 3세기경에 생긴 『마누 법도론』이 있다. 이것은 힌두교인의
실제 종교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문헌이다.
모두 12장으로 구성된 이 문헌에는 부모나 스승을 어떻게 받들까, 참회와 고백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인
가 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가득하다.
이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사성 제도(四姓制度 caste system), 삶의 네 단계, 삶의 네 가지 목적 등이다.
사성제도(四姓制度)-
인도에는 예부터 사람을 바르나(색깔이라는 뜻)에 따라 크게 네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브라만,
둘째는 무사 계급에 속하는 크샤트리야,
셋째는 상공인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바이샤,
넷째는 단순 노동자 계급이나 농부 등 장인 계급에 속하는 슈드라 이다.
그 밑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이른바 불가촉 천민(不可觸 賤民)이 있다.
『마누 법도론』 은 『리그 베다』에 근거하여 이 네 계급이 각각 신의 입. 팔. 넓적다리. 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태어난 계급에 맞는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거기에 따른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삶의 네 단계-
힌두 사회에서 상류 세 계급에 해당하는 사람은 평생을 통해 네 단계를 지나간다고 가르친다.
첫째는 ‘학생’ 단계로서 8세에서 12세 정도까지 집을 떠나 스승과 함께 살면서 『베다』등 경전을 읽고 배운다.
둘째는 ‘재가자(在家者)의 단계로서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는 등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다.
셋째는 ’숲 속 거주자‘ 단계로서 자식이 다 자라고 가장으로서 사회에서 할 일이 끝났으면 숲으로 들어가 명상도 하고 신에게
제사도 지내며 산다.
넷째는 본격적인 ’출가 수행자‘ 단계로서 부인과도 결별하고 완전히 속세를 떠나 걸식을 하며 고행과 명상에 전념한다.
이 단계가 상류 세 계급에게만 허용되는 것은 슈드라나 천민은 『베다』를 읽거나 읽는 것을 들어도 안 되기 때문이다. 상류 세
계급에 속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대부분 이런 저런 이유로 셋째와 넷째의 단계를 이 생에서는 이루지 못하고 다음 생으로 미루
는 형편이다.
삶의 네 가지 목적-
첫째는 즐거움, 둘째는 재산, 셋째는 의무, 넷째는 목샤(해탈)이다.
놀라운 것은 재산을 모으는 것과 인생을 즐기는 것을 인생에서 추구할 정당한 목표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카마 수트라』라는 문헌까지 있어 성적 쾌락을 포함하여 삶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소상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부와 즐거움이 인생에서 전부가 아니고 결국 사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목샤를
얻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인간의 삶에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탐미적 단계와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라고 하였다.
인간은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탐미적 삶을 통해서, 그리고 윤리적 이상의 실현을 통해서 궁극적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신앙의 도약’을 통해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인데 『마누 법도론』에 나온 생각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마누 법도론』은 이처럼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이른 성실히 지킬 때 이상적인 삶이 가
능하다고 가르친다.
『바가바드 기타』
인도 종교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전을 들라면 기원 전 2세기~기원 후 3세기에 나타난 『바가바드 기타』일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전까지 모든 종교의 사상이 흘러 들어가 있고, 또 거기서 이후 모든 종교 사상이 흘러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힌두교 역사상 중요한 문헌이다.
‘바가바드’는 ‘주(主)’라는 뜻이고 ‘기타’는 노래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타』는 ‘주님의 노래’인 셈이다.
본래는 『마하바르타』라는 대서사시의 한 부분이었는데, 나중에 독립된 문헌으로 떨어져 나와 널리 읽히게 되었다. 영화 ‘간
디’에 보면 간디가 아침마다 읽는 책이 바로 이 『바가바드 기타』였다.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1817-1862)는 그의 마음을 꼴 지운 두 가지 책이 있는데, 하나는 에머슨(1803-1882)의 『자연론』이고 다
른 하나는 『바가바드 기타』라고 하였다.
『바가바드 기타』는 ‘신애(信愛)’가 종교 생할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전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힌두 기사 아
르쥬나와 그의 전차장 쌈자야가 등장한다.
둘은 전장에서 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같은 씨족 사이에서 생긴 싸움이므로 아르쥬나는 전장 저 편에 있는 사람을
다 안다.
모두 사촌이고 삼촌이고 조카이고 친척이었다. 아르쥬나는 어찌 이런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가 고민한다. 쌈자야는 아르쥬나가
무사 계급에 속한 무사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무사는 주어진 의무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설득한다.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결국 인생과 우주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나아간다.
나중에 전차장 쌈자야는 비쉬누 신의 현현(顯現)인 크리쉬나였음이 밝혀진다. 따라서 아르쥬나는 크리쉬나의 가르침을 받는 것
이다.
크리쉬나는 금욕적인 생활, 명상 등 요가 수행, 사성 제도를 비롯한 법과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등 목샤에 이르는 여러 방
식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방법 중에서 헌신과 경배를 통한 신애의 방법이 많은 사람에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신애로서 나를 공경하는 사람들, 그들은 내 안에 있으며 나 또한 그들 안에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애를 통해 심지어 “태생이 천한 사람, 여자, 바이사, 그리고 슈드라도 지고의 목표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기별이다. 지금껏 여자나 하층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이 생에서는 구원에 도달할 수가 없고 오로지 선업
을 쌓아 다음 생애서 남자나 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여자도 슈드라도
크리쉬나를 경배하고 사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장한다.
이것은 인도 종교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셈이다.
불교도 같은 맥락에서 종교적 목표에 도달하는 능력을 성별이나 계급에 따라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비쉬누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여러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생각이 강조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을 아바타르(화신化身)라고 하는데, 이런 사상은 지금까지 힌두교에서 아
주 중요한 사상으로 작용한다.
고전 이후의 힌두교
『베다』로 시작된 힌두교의 고전 시대는 『바가바드 기타』와 함께 끝이 난다. 『베다』에 나타난 다신론 내지 단일신론적 종교 『브
라마나스』에 나타난 제의적 종교, 『우파니샤드』에 나타난 철학적 종교,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난 헌신적 종교 등이 고전 시대
에 속한다.
이런 요소가 역사의 강을 이루어 흘러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그 하류를 보기로 한다. 이를 고전 이후의 힌두교라고 하는
데, 이때 생겨난 중요한 종교 현상은 첫째가 삼신(三神) 경배이고, 둘째는 철학적 학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삼신(三神) 경배
고전 이후 힌두교에서는 '세 신(trimurti)'이 크게 부각된다.
첫째는 브라흐마(Brahma)로 창조의 신이요,
둘째는 쉬바(Shiva)파괴의 신이요,
셋째는 비쉬누(Vishinu)로 보존의 신이다. 이 신 중에 하나를 믿고 헌신하면 목샤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브라흐마 -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궁극 실재 ‘부라흐만’과 혼동하면 안 된다.
브라흐만은 중성 명사이고,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남성명사이다. 비록 창조신으로서 존경받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은 세계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창조신은 창조를 마친 후
나 심지어 찬조 도중에 일단 전면에서 물러나 잊혀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신을 라틴말로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라
한다. 잊혀진 신, 소홀해진 신이라는 뜻이다.
쉬바 -
파괴와 죽음의 신이다. 쉬바가 파괴의 신이면서 경배를 받는 것은 파괴가 건설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뜻으로 좋게 받아들여
지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고행자나 수행자가 쉬바를 경배하는 것은 옛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데 쉬바가 도와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쉬바는 춤의 신이기도 하다. 그가 춤추는 모습을 담은 조각(彫刻)은 흰두교 관련 조각에서 가장 흔하다. 그이 춤 때문에 우주 생
성과 파괴의 리듬이 가능하다고 한다.
쉬바는 식물, 동물,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죽음은 새로 태어남의 전제 조건이므로 죽음을 알리는 신은 태로
태어남과 성(性)을 관리하는 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의 생식기가 언제나 발기 상태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남자의 생식기가 등장한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그 상징물과 접촉하면 임신할 수 있다고도 믿는다.
쉬바를 섬기는 사람들은 쉬바를 실제적으로 창조의 신, 파괴의 신, 보존의 신을 다 합한 신, 심지어 우주 만물의 궁극 실재 자체
라고 믿는다. 인간은 무지 때문에 쉬바와 떨어져 살고 있는데, 지혜나 신애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됨으로서 목샤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쉬바뿐 아니라 쉬바와 짝을 이루는 여신들도 경배의 대상이다. 이런 여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신은 칼리다.
칼리는 해골로 된 목걸이를 하고 원수의 목을 잘라 들고 있으며 피를 마시는 등 검은 피부의 무시무시한 여신으로 묘사를 된
다.
필자도 1987년 인도 켈커타 국제공항 안 어두컴컴한 방에 설치된 칼리 상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켈커타’라는
지명은 칼리의 발가락이 묻힌 곳에 세운 신전의 이름 칼리카타에서 왔다고 한다. 칼리를 경우에 따라 두르가 혹은 파라바티 라
고도 부른다.
쉬바의 아들로 가네샤가 있다. 사람 몸에 코끼리 머리를 한 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상징한다. 인도 어디를 가나 이 신
을 섬기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비쉬누 -
보존의 신이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신이기도 하고, 장난 혹은 유희의 신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쉬누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 세상이 혼탁해질 때마다 인류를 돕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표현된 대로 크리쉬나로 나타나기도 하고, 나중에 불교가 등장하자 붓다는 바로 비쉬누의 현현이라 주장
하기도 했다.
그밖에 물고기나 다른 동물로 나타나 그때그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신으로 묘사된다. 제10의 아바타르
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는 나중에 백마를 타고 칼킨으로 나타나 의인과 악인을 심판해서 상벌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쉬바를 경배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쉬누를 섬기는 사람들도 비쉬누를 실제적인 궁극실재로 경배한다. 이들은 자신의 고
행이나 행위보다는 비쉬누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강조하고, 그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시를 많이 짓기도 했다.
비쉬누의 짝이 되는 여신은 락스미로서 풍요와 부와 승리의 여신이다. 흔히 비쉬누와 인간을 연결짓는 중재의 역할도 맡는다.
남편 비쉬누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나중에 나타난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라마는 비쉬누의 가장 중요한 아바타르 중 하나이다.
철학적 학파들
고전 후기 시대에 나타난 종교 현상은 신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이 천착함으로써 목샤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형성한 종교 내지 철학 학파가 크게 여섯이 있는데,
쌍키야 학파,
요가 학파,
미만사 학파,
바이세카 학파,
나야 학파,
베단타 학파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이른바 쌍둥이 학파라는 쌍키야 학파와 요가 학파, 베단타 학파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쌍키야 학파 -
요가 학파와 더불어 쌍둥이 학파라 하는데, 쌍키야가 이론을 제공하고 요가가 실천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쌍키야 학파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붓다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쌍키야’라는 말은 ‘구별’을 뜻한다. 쌍키야 학파 이론에 의하면 우리에게 있는 근본 문제는 정신과 물질이 뒤섞인 상태인데, 문
제를 없애는 길은 물론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가 학파 -
이 학파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나왔다. ‘요가’라고 하면 몸을 틀고 이상한 동작
을 하는 신체 단련법 쯤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신체적인 것을 특히 강조하는 요가는 하다 요가로서 요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요가 학파에서 가르치는 요가는 기원전 2세기경에 살았던 파탄잘리가 『요가경』이라는 문헌에 정형화해 놓은 ‘라자(王) 요가’를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소를 쉽게 몰기 위해 소에게 씌우는 ‘멍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yoke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요가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일컫는다. 『요가경』에도 “요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마
음을 다스리기 위해 물론 몸도 다스리는데, 이렇게 몸을 다스리는 것이 일반인의 눈에 잘 보이므로 요가라고 하면 몸을 수련하
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요가경』에 나오는 라자 요가에 의하면 여덟 가지 단계를 거치면 마음이 물질에서 구별되어 본래의 순수함을 찾게 된다고 한
다. 그 여덟 가지 단계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말과 생각에 거짓됨이 없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취하지 않는다./정욕과 성욕을 억
제한다./ 욕심이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선물은 받지 않는다.
2. 하여야 할 것을 한다.
정결하게 한다./ 만족한다./ 용기를 갖는다./ 경전을 읽는다./ 신을 경배한다.
3. 자세를 바르게 한다.
가장 좋은 자세는 가부좌하는 것이다.
4. 숨을 고른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호흡 조절을 배운다.
5. 감각을 외부 자극으로부터 거두어들인다.
외부자극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상태가 된다.
6. 마음을 한 곳에 모은다.
마음을 코끝이나 불꽃이나 작은 신상(神像) 같은 물체에 고정시킨다.
7. 명상
6번을 더욱 오래 연장시킨다.
8. 삼매
드디어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어지고, 영원한 정신이 물질에 오염되지 않은 채 “순수 의식으로 그 순수한
본성 속에서 빛나게 된다.
베단타 학파 -
‘베단타’는 ‘베다의 끝’이라는 뜻으로 이 학파의 기본 사상이 베다의 끝이 『우파니샤드』에서 나왔음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완성
이라는 말이다. 베단타 학파는 그 강조점의 차이 때문에 세 개 학파로 나뉜다.
첫째, 불이론(不二論) 베단타 학파는 인도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샹카라(788 -820)가 창시한 학파이다.
브라흐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 궁극 실재임을 강조한다. 영어로는 ‘non-dual','one without second'라는 말을 쓴다. 이 세상에
오직 브라흐만이 실재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야에서 생겨난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 브라흐만은 『우파니샤드』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샹카라에 따르면 이런 브라흐만은 궁극적으
로 아무런 특성을 가질 수가 없다.
브라흐만은 ’니르구나 브라흐만(특성 없는 브라흐만)‘, 곧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굳이 뭐라고 해야
한다면 “샷 칫 아난다” 곧 “순수한 존재, 순수한 앎, 절대적인 기쁨”이라고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라흐만을 이렇게만 생각하면 너무나 추상적이므로 한정된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어떤 관계를 맺을 수
도 없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에 모든 아름다움 특성을 다 붙여서 생각해도 좋다고 한다. 이런 면의 브라흐만을 ‘싸구나 브라흐만
(좋은 특성의 브라흐만)’이라고 했다. 좋은 특성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인격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브라흐만에 인격적 특성을 부
여하여 ‘이슈바라(주님)’라고 부르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샹카라에 따르면 싸구나 브라흐만은 어디까지나 도구적인 단계이므로 결국은 니르구나 브라흐만을 깨달아야 목샤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샹카라 자신은 브라흐만을 가장 잘 대표하는 신이 쉬바라고 믿고 쉬바를 숭배하였다. 그는 불교를 박멸해야 한다고 믿고 불교
박해에 앞장선 것으로 유명하다.
둘째, 수정된 불이론(不二論) 베단타 학파가 있다. 창시자는 라마누자(1056-1137)이다.
샹카라가 이 세상에서 브라흐만 왜에 모든 것은 허상이라고 했는데, 라마누자는 그렇다면 신을 경배하는 것은 곧 나를 경배하
는 셈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비이분법적 일원론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인간 영혼의 독립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또 샹카라가 브라흐만을 인격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저급한 형태라고 한 데 반하여 라마누자는 브라흐만을 ‘주님’ 곧 인격적으
로 경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라마누자 자신은 비쉬누를 믿었으며, 구원이 지식으로 뿐만 아니라 신
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라마누자 이후 신의 은총을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 신의 은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두 파로 갈라졌는데, 한 파는 원숭이 학파요 다른 하나는 고양이 학파였다.
원숭이 학파는 엄마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를 옮길 때 새끼 원숭이가 필사적으로 엄마에게 달라붙듯이 신이 우리를 은총으로
구원하시되 우리로서 최선을 다해 뭔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고양이 학파는 엄마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옮길 때 새끼 고
양이가 전적으로 엄마 고양이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도 신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 믿음과 행위를 함께 강조하는 쪽과 믿음만을 강조하는 쪽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셋째, 이원론적 베단타 학파는 마드바(1199-1278)가 창시자이다.
마드바는 라마누자처럼 인격신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비쉬누를 섬겼다. 그러
나 라자누자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오직 브라흐만이 실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브라흐만과 세계와 인간이 각각 분리되었다고 주
장했다.
세 가지 길
힌두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과 구원을 얻기 위한 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힌두교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도 언뜻 보았지만, 힌두교의 궁극 목표는 목샤를 얻는 것이다.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인도에서 생긴 종교는 공통적
으로 윤회를 믿는다.
우리 삶이 이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죽어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카
르마, 즉 업(業)이다.
선한 업을 쌓으면 좋게 태어나고 나쁜 업을 쌓으면 나쁘게 태어난다. 좋게 태어나든 나쁘게 태어나든 이렇게 계속 죽고 태어나
고 다시 죽고 태어나는 윤회의 삶, 혹은 삼샤라의 삶은 이상적인 삶이 아니다. 언제나 변하고 안정이 없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이런 윤회의 삶이 계속하는 것은 결국 비극이다. 따라서 삶의 궁극 목표는 이 비극적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
이다. 이렇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놓여지는 것, 해방되는 것을 목샤 또는 해탈이 하고, 이것이 바로 종교의 궁극 목표
이다.
힌두 전통에서는 이 궁극 목표를 이루는 길이 보통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는 행동의 길,
둘째는 신애(信愛)의 길,
셋째는 지혜의 길이다.
첫째 행동의 길이란 계율이나 도덕 규범을 잘 지키고 이우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의 길에 이르려는 것이다.
둘째, 신애의 길이란 어느 신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받드는 일이다. 세 가지 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택하는
길이기도 하다. 신을 부모, 주인, 연인, 친구, 심지어 갓난아기로 여기며 경배하며, 그 신의 이름을 열심히 불러 더욱 깊이 사랑
하려는 것이다.
셋째, 지혜의 길이란 궁극 실재를 직접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 등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것이다.
무지무명(無知無明)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므로 이를 없애야 해방된다고 본다. 이 길은 가장 짧은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가장 가
파른 길이기에 오로지 몇몇 상근기(上根器)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세 가지 길이 가진 공통점이 모두 ‘자기’를 잊는 것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남을 위한 희생 봉사, 신에 대한 절대적 헌
신, 잘못 알고 있는 ‘자기’란 궁극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 이 모두가 지금 이대로의 ‘나’는 사라진 상태가 아닌가.
근대의 힌두교
힌두교도 현대 문명의 도전 앞에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17세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서
양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영국 선교사 윌리엄 케리(1761-1834)를 필두로 19세기 서양 선교사가 많
이 들어와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시작하면서 힌두교 내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개혁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어난 개혁 운동의 선구자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현대 인도의 아버지’ 람 모한 로이(1774-1833)였다. 로이는 남편
이 죽으면 여자가 남편과 함께 화장 당하는 수티 제도와 열 살도 채 안된 여자아이를 중년 남자와 결혼시키는 어린이 조혼제도
를 선교사와 협력하여 불법화했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에 좋은 점이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특히 힌두교의 다신론적 태도나 우상
숭배적 경향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런 개혁 운동이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 ‘브라모 사마즈’라는 단체를 설립했으며, 이것이 19~20세기 인
도 개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종교적인 면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개혁자는 라마크리슈나(1836~1886)였다. 켈커타에서 칼리 숭배자였지만 철학적으로는
샹카라의 불이론 베단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를 모두 직접 체험해 보고, 결국 이 종교들이 근본적으로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
신하고
“산꼭대기는 하나이지만 그리로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비베카난다는 이런 확신을 널리 펴는 데에 크게 힘썼다. 특히 1893년 시카고 세계 종교회의에 힌두교 대표자로
참석해 베단타 사상을 서양에 소개하여 힌두교뿐 아니라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현대 힌두교 개혁자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역시 간디(1869-1948)였다.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하는데, 마하트마는 ‘위대
한 정신’이라는 뜻의 존칭이다. 그는 힌두교뿐 아니라 자이나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에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 소로, 퀘이커교 등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이런 다양한 종교적 전통에서 얻은 지혜와 이상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인도 독립을 이루려고 노력했는데, 이를 위해 그가 채
책한 가장 유명한 원칙은 ‘아힘사’와 ‘사탸그라하’였다.
아힘사는 보통 ‘비폭력’이라고 번역되지만 일체의 생명에 해를 주지 않는 것, 생명을 ‘살림,’ 생명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탸그라하는 진리파지(眞理把持)라고 번역하는데, 우리 행동이 감정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라, ‘참된 현실을
진정으로 꿰뚫어 본’ 결과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면 인도 사람만 비인간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비인간화하는 영국 사람도 똑같이 비인간화되는
것이니 인도의 독립은 감정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인도 사람이나 영국 사람 다 같이 인간화의 길을 가는데 꼭 필요한 일이
므로 이를 성취해야 한다는 식이다.
간디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하리잔, 곧 ‘신의 자녀’라 불렀고 1948년 불가촉천민을 차별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헌법
에 명시하는 데에 공헌했다.
간디의 사상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큰 예가 1960년대 미국 인권 운동을 지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미얀마
민주화에 앞장선 여성 지도자로서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웅산 수 치 여사 같은 사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48년 간
디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는 데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힌두교의 오늘
힌두교는 주로 인도에 있는 종교이지만, 발리섬 같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도 있고, 특히 최근에는 인도인이 영국이나 북
아메리카로 많이 이민하므로 서양에서도 많이 믿는다. 필자도 1987년 초 인도를 여행하다가 가장 거룩한 도시라는 바라나시에
서 개에게 물려 일정을 중단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짧은 기간 인도에서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이 ‘너무나 종교적’이라는 것이었
다.
이런 강한 종교적 성향이 좋은 면도 많지만,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힌두교와 이슬
람교의 충돌이다.
인도는 18세기 영국이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여러 세기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파키스탄이나 방글라데
시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인도 내에도 이슬람교인이 많다. 현재 단위 국가 중에서 인도는 인도네시아 다음으
로 가장 많은 이슬람교인을 가진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힌두교 근본주의자 일부는 인도를 완전한 힌두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이슬람과 충돌을 빚는다. 최근
아이러니하게도 간디의 고향 구자라트 주에서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 사이에 유혈충돌로 몇 백 명이 죽은 일이 있다.
한편에서는 대부분이 시크교도인 펀잡 지방이 독립을 주장한다. 인도인의 종교적 관용 정신이 시험대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인도의 다종교적 상황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비교종교학자 오강남교수의 세계의 종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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