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釋迦)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고 ‘사카’라는 부족의 이름이며 ‘무니’는 성자(聖者)라는 의미라고 하니 ‘석가족의 성자’ 라는 의미로서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붓다 곧 부처라는 이름도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싯다르타’ 라는 이름이 석가의 이름으로 ‘싯다르타’라는 이름도 ‘목적을 이룬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성자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가 태어났을 때 ‘아시타’라는 사람이 석가에 대해서 예언을 하기를 세속의 왕이 되면 위대한 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위대한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석가의 아버지는 석가가 혹시 부처의 길을 걸을 까 싶어서 18세에 결혼을 시키고 호화로운 궁중생활을 하게 하여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는 29세가 되는 어느 날 궁궐 밖 세상을 한 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더니 아버지는 허락을 하면서 혹시 아들의 마음이 산란해 질까봐 그런 것들 다 정리하고 난 뒤에 바깥에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석가가 밖에서 처음 본 것은 늙은 꼬부랑 노인으로 석가는 큰 충격을 받고 마부에게 물었더니 인간은 늙으면 다 저렇게 된다는 말에 아주 큰 충격을 받고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두 번째 나갔을 때는 병든 사람을 보게 되었다. 또 크게 놀라서 마부에게 물어본 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왔다고 하며,
세 번째 나갔을 때는 죽은 시체를 보고 다시 큰 충격을 받아 다시 귀가하였고.
네 번째 나갔을 때는 어느 탁발승을 보게 되었는데 마부는 그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석가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왕궁을 몰래 탈출하여 6년간의 수도 생활 후에 때달음을 얻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와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사람들이 부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석가는 그것을 보고 비로소 인간의 늙어서 죽는 것 생,노,병,사를 알게 되었으며 사람이 죽는 것도 처음 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인식할 나이를 일곱 살 정도로 봤을 때 석가는 29살까지 살았으니 22년 동안을 성안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왕궁 안에 수천 명이 살고 있었을 것이니 그들이 인간인 이상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석가도 그것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네 가지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출가를 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생 노 병 사를 보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다가 그 광경을 보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 카를 융에 의하면 30대 초반이 되어야 인생사에서 참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개인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 시작된다고 한다. 곧 인생의 여러 문제를 나 자신의 문제로 심각하게 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나 무하마드, 루터, 웨슬리의 경우 모두 30세쯤에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고 하니 아마 석가도 30세에 접어들면서 이런 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로 새롭고 심각하게 다가옴을 느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30 세가 되는 해에 자신이 부여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출발, 곧 공생애의 노정(路程)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뜻을 결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30에 입지(立志)를 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했다는 의미로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성인(聖人)들이 30 즈음에 그런 생각들을 한다면 보통 사람들도 30 즈음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들은 보통 인간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만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로서 먼저 깨달은 사람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누가 뭐래도 그들은 인간이며 신(神)이 아니다.
그래서 석가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가오타마’(깨달은 자)로 부르지 말고 여래(如來)로 부르라고 했었고, 예수도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부르며 ‘자신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요 너희들은 나중 익은 열매’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석가나 예수가 신이 된 것은 후세인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또는 다른 필요에 의해서이다.
깨닫는다는 의미를 한 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자연의 이치는 어떤 것이며 신(神)의 존재는 어떤 것이며 인간과 신은 어떤 관계인가를 아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깨달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인의 삶이라고 한다면 사실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가 있고 모든 사람은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보통사람들도 30이 되면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서 깨달은 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지만 그냥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망자에게 절하고 술 한 잔 먹고 나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진이 거기에 걸리는 날이 1년 후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술 한 잔 먹고 나오지는 못할 것 아닌가?
모든 종교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힌두교에는 인간의 삶에 네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생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재산을 모으는 것, 셋째는 가족 등을 부양하는 등의 의무, 넷째는 목샤(해탈)이라고 한다.
그리나 궁극적으로는 목샤를 얻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를 보더라도 인생에 있어서 30대는 특별한 시기임에 틀림 없는 것 같으니 그 시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난 사람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지.....
젊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하느라고 세상에 대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나이가 50이 넘어서도 세상의 일에만 매달려서 인생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도 또한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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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은 비교신학자인 오강남교수의 세계의 종교라는 책 중 불교 부분의 일부로 석가가 고행 끝에 때달은 부분임
사성제 팔정도
붓다가 다서 수도승을 위해 한 처음 설법을 제1차 ‘진리의 바퀴를 굴리심(轉法輪)’이라고 한다.
그는 우선 지나친 쾌락과 고행을 피하고 ‘중도’의 길을 택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중도의 내용이 우리가 잘 아는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이다.
사성제의 제(諦)는 보통 ’체‘로 발음되지만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 ’제‘로 발음하고 있어 그대로 따른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苦集滅道)‘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달으라는 가르침이다.
첫째로 고제(苦諦)는 ‘괴로움’의 진리이다. 삶이 그대로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고’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두가(duhkha)는 기름을 둘러 부드럽게 돌아가야 할 바퀴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린다는 뜻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生老病死)이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대해야 한다는 괴로움(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존제 자체의 괴로움(五 盛苦)을 말한다. 이른바 ‘사고(四苦)’ ‘팔고(八苦)이다.
이런 괴로움은 육체나 정신의 차원뿐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불완전함, 제한됨, 모자람 같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불교가 이렇게 삶을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보았다고 불교를 ‘비관적인’ 종교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비관적이냐 낙관적이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realistic) 관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병이 있다고 진단할 경우 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만 보느냐고 따질 수는 없다.
사실 거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삶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병이 있은 것을 알고 받아들이려는 것이 병을 고치려는 노력의 시작인 것처럼, 인간의 조건이나 고통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다.
둘째로 집제(集諦)는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진리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목마름’ 때문이며, 목마름이란 집착, 정욕, 애욕, 욕심, 욕정으로 목마름을 뜻한다. 이런 타는 목마름 때문에 우리에게 괴로움이 따른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멸제(滅諦)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는 진리다.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선포하는 셈이다. 이 괴로움의 세상에서 열반 혹은 니르바나(nirvana)를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기도 하다. ‘니르바나’는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이다. 우리 안에 타고 있는 정욕의 불길을 ‘훅’ 하고 불어서 끈 상태가 바로 니르바나이다.
넷째로 도제(道諦)는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말하는 진리다. 이 길의 구체적 내용을 말하는 것이 바로 ‘팔정도’ 즉 ‘여덟 갈래의 바른 길’이다. 길이 여덟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덟 가지 요소로 구성된 하나의 길이다.
여덟 가지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정견(正見): ‘붓다의 가르침을 옳게 보고 받아들임‘을 뜻한다.
2. 정사(正思): 자기르 비우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정언(正言): 거짓말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사람 사이에 불화를 가져올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4. 정업(正業): 살생, 훔치기, 음행 등을 금하는 것이다.
5. 정명(正命):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① 건전하지 못한 마음 상태가 생기지 않도록 ② 그런 마음 상태가 이미 있으면 없애도록
③ 건전한 마음 상태가 생기도록 ④ 그런 마음 상태가 생겨났으면 잘 가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음의 7.8이 잘 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7. 정념(正念): ① 몸의 움직임 ② 감각이나 감정 ③ 마음의 움직임 ④ 개념이나 생각 등에 마음을 다해 의식하는 것 이것은 영어로 mindfulness로 번역하는데, 동남아 불교에서 많이 강조하는 수행법이다.
8. 정정(正定): 마음을 한 곳에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삼매(三昧)라고 번역된다.
위의 여덟 가지를 셋으로 나누어 1과 2를 합하여 혜(慧)라고 하고, 3,4,5를 합하여 계(戒)라 하고, 6,7,8을 합하여 정(定)이라 한다. 보통 이를 “계정혜‘라 하여 ’삼학(三學)‘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배움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등의 계율이 ’상벌‘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계율을 지키되 나중에 받게 될 상벌을 염두에 두고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적 태도’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그런 율법주의적 태도가 없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물의 본성을 알고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준비 단계로 보았다. 율법의 비율법주의적 이해, ‘인간적이 접근’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사성제 팔정도를 가르치자 다섯 수도승 중에서 하나가 깨달음을 얻었다.
붓다는 계속해서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무아는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차가 실제로는 나무 판자, 바퀴 살, 심보, 밧줄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마차’는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아라는 것도 물질(色), 감정(受), 생각(상), 충동(行), 의식(識)이라는 다섯 가지 존재 요소의 일시적 가합(假合)일 뿐 그 자체로는 실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아는 집착과 자아 중심주의가 모든 말썽과 사고의 근원임을 자각한 윤리적 판단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해준 셈이다. 우리의 자아가 허구임을 알게 되면 그만큼 자유스러워지고, 세상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진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뿐 아니라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이를 일러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여,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와 더불어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三法印)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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