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논리적으로 보면 전생은 있을 수가 없다.
전생이 있기 위해서는 최초의 전생이 있어야 하는데 최초의 전생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생은 없을 것이며 전생이 없다면 윤회도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전생이 있으면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다 같이 전생이 있어야 하고 윤회를 하게 되면 동양인이나 서양인이 다 같이 해야한 것이며 동양인들만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하며 서양인들은 윤회를 하지 않고 부활(기독교)을 한다는 것은 믿는 종교의 따라서 삶과 죽음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이 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에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의 질(質)은 달라질 수가 있을지 몰라도 종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의 형태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동양종교라고 할 수 있는 힌두교와 유(儒), 불(佛),선(仙) 쪽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거나, 아니면 서양종교인 기독교, 회교 쪽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 틀렸거나 이다.
어쨌든 논리적으로 볼 때 둘 중의 하나가 맞거나 둘 다 틀렸거나가 되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했다는데 그것을 본 사람은 극 소수이고 그 이외는 부활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예수님도 부활을 했으면 지상에 있어야 하는데 지상에 있은 적이 없으니 사실은 그 부활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믿어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윤회와 관련된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또는 현재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은 내용들이 있어왔었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우리가 불교 생활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윤회를 있게 하는 전생이라는 것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살고는 있으나 자신이 윤회를 통해서 전쟁과 이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없다.
만일 자신이 전생과 이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전생의 업을 멸하기 위한 수도(修道)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로 편하게 살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전생이라는 말은 하지만 자신이 전생의 업장(業障)을 닦아 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지 않는가?
2.전생이 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TV 프로그램에서 스타들의 전생을 최면을 통하여서 알아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것을 본 사람들은 그 전생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서 궁금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것을 확인할 방법도 없으므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의 전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궁금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전생이란 말 그대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닌 생전에 살았던 세상이다. 그리고 그 전생은 현재의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전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고 전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나의 의지와 현재의 나의 삶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전생이 있었던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최면이 된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전생을 기억하여 말하는 내용 가운데는 사실적인 부분도 있어서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부분도 있고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거나 황당한 내용도 있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생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생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본인의 직접적인 전생은 아니다.
그러면 전생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며 왜 전생인 것처럼 보이는가?
3. 전생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
전생이 있다면 윤회도 인정을 해야 하는데 윤회가 가능한가 ?
전생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회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윤회란 말 그대로 삶이 반복되어진다는 의미이고 윤회는 지상에서의 삶의 내용에 따라 사람도 되었다고 짐승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 윤회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데 윤회를 하는 목적을 이해한다면 윤회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윤회가 불가능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만약 신(神)이 인간의 삶에 어떤 메카니즘을 도입했다면 그 신은 그 메카니즘을 통해서 인간에게 유익한 결과를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이 인간의 삶에 윤회라는 메카니즘을 도입했다면 그 윤회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점점 선(善)해져서 결국에는 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완전해 지는 것일 것이다.
윤회라는 장치는 더러운 물을 깔때기로 거르는 것과 같은 여과장치와 같은 순기능(順機能)을 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윤회를 통하여서는 순기능의 역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왜 그런가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자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나 모든 짐승들은 윤회의 굴레 속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짐승들은 전생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른 짐승들이나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그들에게 윤회라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비롯하여 육식을 하는 동물들은 전생의 죄에다가 현생의 죄까지 더해지는 셈이다.
이런 윤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들이 자신이 전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리가 없고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전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살면 살아갈수록 전생의 업장에다가 현생의 업장을 더하는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라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이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측면에서 윤회나 전생은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인생은 전생의 업보라는 윤회의 개념이 도입된다고 한다면 그 부작용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습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결과이다.
현재 삶이 고달픈 사람들은 전생의 업보로 인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순응하면서 살아간다는 순기능의 역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전생을 인정한다면 현재의 결과를 전생의 탓으로 돌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채임을 남에게 전가하는(전생도 현재의 자기 자신은 아니므로) 무책임한 인간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또 전생을 인정한다면 다음이라는 후생의 기화가 있기 지금 살아가는 삶이 불성실해 질 수 있다.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는 마음에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가능성을 창조주가 제공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윤회라는 제도를 창조주가 만들 필요가 없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이 그 세대를 이어가는 기계적인 매카니즘을 보기로 하자.
씨앗을 보면 그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서 또 자기와 같은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 씨앗은 그것으로서 끝이다. 그 씨앗은 다시 씨앗으로 직접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씨앗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 이미 또 다른 자신인 다른 씨앗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직접 같은 모습이로 리싸이클링이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윤회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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