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이야기 계속...
영화를 보지 않아서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 할 수 가 없으나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가 있다.
글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작가는 일암이 엄마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하게 한 것으로, 가해자를 인간답지 못한 인간으로 만든 종교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구원과 용서를 운운하였지만 소설의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소설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이성으로 수용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용서를 수용하기를 강요하는 종교에 대해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냈었다.
어디에도 그런 용서를 수용한 적이 없으며 그 글을 읽어보면 누구나 그런 용서를 수용하기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일암이 엄마를 찾아와 위로도 했다가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하는 김집사는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이다.
유괴 사건의 전개와 일암이 엄마와 김집사의 대화를 보면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 중에 일암이 엄마와 김집사의 대화를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유괴 사건이 일어난 후
(꺽쇠 안은 소설의 원문임)
< - 두고 보세요 . 내 언제고 알암이 엄마를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고 말 테니까. 알암이 엄마라고 어렵고 마음 아픈 일이 안 생길 수 있겠어요. 애 엄마한테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때가 찾아오게 될 거예요. 내 그땐 반드시…….
그럴 만한 어떤 계기라도 기다리듯 계속해서 뜸을 들이고 가곤 하였다. 별반 악의가 깃들지 않은 소리들이어서 아내도 그저 무심히 들어 넘기곤 해 오던 처지였다.
한데 과연 그녀의 예언처럼 아이의 사고가 생기고 만 것이었다.
김 집사는 마치 그거 보라는 듯, 혹은 기다리던 때라도 찾아온 듯 아이의 실종사고가 생기자 금세 다시 아내에게로 달려왔다.>
김집사는 하나님에게 의지할 것을 권유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엄마는 김집사의 뜻에 따르게 된다.
< - 그분은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모든 일을 뜻대로 행하실 수가 있는 분이시지요?
아내가 모처럼 귀가 솔깃해져서 애원하듯 김 집사에게 묻고 들었다. 하니까 김 집사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 하느님은 전지전능, 우주 만물을 섭리하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독생자이십니다.
- 그럼 그분은 우리 아이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 것도 알고 계신 걸까요?
-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알암이는 지금 그분께서 사랑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런 건 너무 걱정 마시고 우선 먼저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께 의지할 결심부터 하세요.
- 그분이 우리 아일 무사히 되돌려 보내 주실까요?
- 그분의 뜻이 계시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걸 바라기 전에 당신의 믿음을 먼저 그분께 바쳐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당신의 믿음을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김집사의 권유로 일암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일암이의 사체가 발견되고 나자 일암이 엄마는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 알암이 엄마 , 그렇게 주님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다 원망을 지니면 자신만 더욱 고난스러워져요. 그야 지금의 알암이 엄마한텐 무리한 주문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애 엄만 그럴수록 마음을 부드럽게 지녀서 주님의 사랑을 맞아들이도록 하셔야 해요. 주님의 사랑과 오묘한 섭리는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이번에 알암이가 당한 일만 해도 우리 인간들의 눈에는 슬픔뿐이지만, 거기에 어떤 주님의 섭리가 임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주님의 사랑과 섭리와 권능을 믿으시면 거기서 알암인 구원을 받을 거예요. 알암이가 이번에 당한 일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니까요. 그 왜, 있지 않아요. 주님께선 그 당신의 사랑을 위해 누구보다 먼저 알암일 당신 곁으로 부르셨을 수도 있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내에겐 그 김 집사의 위로가 좀 지나쳤었던지 모른다. 혹은 아내로선 마음속에 사무친 원망과 저주를 죽어도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 아내가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마치 눈앞의 하느님에게 대들기라도 하듯이 김 집사를 향해 외쳐 대기 시작했다.
- 아니, 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느님이 그토록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알암이를 그렇게 만든 살인귀 악마를 아직까지 숨겨 두고 계실 리가 없어요. 알암인 이렇게 죽고 말았는데, 범인은 아직 붙잡히질 않고 있지 않아요. 하느님이 정말 모든 걸 아신다면 어째서 그놈을 아직 가르쳐 주지 않는 거예요. 알고도 부러 숨겨 두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놈과 한패거리와 다를 게 무어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걸 아시고도 아이를 그 꼴로 만들어 보내신 건가요. 처음부터 그놈과 한패거리로 일을 그렇게 꾸며 가지고 말이에요.>
그러나 일암이 엄마는 김집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 하느님의 깊은 섭리의 역사를 우리 인간으로는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지 않았어요. 알암이의 슬프고 불행스런 사고가 그 어머니에게 주님을 영접케 할 은총의 기회일 줄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건 모두가 이런 영광과 은총을 예비해 두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시켜 맞이하시려는 사랑의 시험에 불과했던 거예요.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감내했어야 할 일들이었지요. 그토록 오묘한 주님의 섭리와 사랑의 역사 앞에 우리가 어찌 알암이의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어요. 죄인을 아주 용서하도록 하세요. 그게 틀림없이 주님의 뜻이며 기쁨이실 거예요>
일암이 엄마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가서 용서를 해 주기로 하고 교도소에 가서 오히려 어미인 자신보다 더 평안한 범인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고 다시 절망하게 된다.
그러자 김집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용서를 해 주자 않는 일암이 엄마를 오히려 책망하게 된다.
<-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그러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깊으신 뜻을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당신의 뜻을 따라 복종을 해나갈 의무밖에 없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서 그를 용서하셨다면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종이 된 우리 인간들의 의무인 거니까요. 알암이 엄마도 그날 똑똑히 들었지만,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책벌이라도 달게 받을 각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가 이미 주님의 사함 속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혼의 평화를 얻고 있는 증거였어요. 그래서 그는 애 엄마의 어떤 원망이나 증오도 달갑게 감수하고, 그걸 용서할 수가 있었던 거예요.
- 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게다가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하긴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질투 때문에 더욱더 절망하고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내게 어떤 저주가 내리더라도 미워하고 저주하고 복수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말이에요…….>
결국 일암이 엄마는 사형수가 사형 전에 했던 말을 라디오로 듣고 자살하게 된다.
****
대부분의 사람도 작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것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이 자신을 의지하기 믿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불행한 일을 당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만약 그런 하나님이 있다면 누가 그런 하나님을 믿겠는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면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될 것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과연 선한 하나님이 악한 결과를 예정해 놓을 수 있는가?
일암이가 유괴를 당해서 죽은 것도 일암이와 일암이 엄마를 더 사랑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도 어미에게 아이를 유괴 당하게 하여 죽게 하는 그런 방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악한 인간의 행위에 하나님을 섭리를 개입시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잘못에 하나님을 입맛대로 끌어다 써서야 되겠는가?
****
유머 하나
구두쇠 영감이 있었다.
그 구두쇠 영감의 부인이 아파서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의사는 그 영감에게 한 번도 진료비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든지 진료비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영감의 다짐을 받고 영감의 집에 갔다.
가서 청진기를 대보니 그 마누라는 숨이 넘는 중이었고 결국 손도 써 보기 전에 죽고 말았다.
‘안됐지만 부인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집에 가야겠으니 진료비를 달라고 하자
‘당신이 내 마누라를 살렸소?’ 하고 구두쇠 영감이 물었다
‘아니요’
그럼 ‘당신이 내 마누라를 죽였소?’
그러자 의사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면서
‘내가 언제 당신 부인을 죽였단 말입니까?’
그러자 구두쇠 영감이 의사에게
‘그러면 당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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