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이 창동 감독이 기독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했던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고서 한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자신은 종교를 가지지 않고 살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종교인들이 많으며 원하든가 원하지 않든가 간에 그들과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좋은 영향도 받겠지만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교리를 그대로 신봉하는 그들의 생활자세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종교인들을 대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벌레 이야기...참으로 황당한 용서
인터넷을 뒤져서 이창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어 보았다.
작가는 80년대 초 마포의 한 고등학교 체육선생이 제자를 유괴하고 살해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마음이 평안해 하는 것을 신문지상에서 보고 충격을 받아 이 사건을 동기로 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작가는 이 글에서 자식을 읽고 비통으로 좌절해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여 일어서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범인까지를 용서하게 하도록 하게하지만, 용서의 문제 때문에 결국에는 그 어머니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교회의 모습을 김집사라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통하여 그리고 있다.
글을 읽고 나면 죄를 지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만드는 기독교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이 들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이 벌레이야기라는 글을 읽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비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기독교에 귀의한 죄인이 그렇게 변하는 것에 대해서 황당한 느낌과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작가도 제자를 유괴하여 살해하고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그렇게 변화시킨 종교의 긍정적인 힘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거스르는 종교의 부당함을 주인공의 자살이라는 것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글의 이름을 벌레이야기로 하였을까?
작가가 그 글의 제목을 이렇게 한 것은 인간을 벌레처럼 하챦은 존재로 여기도록 하는 종교가 맘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인간을 벌레로 표현한 것은 구약성서 시편 22편 6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
이 시는 3,200여 년 전 사람인 다윗이 범죄(사실 다윗은 많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다)한 자기 자신을 벌레로 비유하여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고백한 내용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아들 김홍걸이 재판을 받을 때 재판부의 선처를 부탁하면서 이 시편의 성서를 인용하여서 세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 제목을 이렇게 이름 지으면서까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용서의 주체가 당사자인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 만드는 용납할 수 없는 종교의 부당함이었을 것이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용서는 용서를 하는 사람과 용서를 받는 사람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제3자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당사자인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용서를 해 준다면 그것이 용서가 되는가?
용서는 당사자가 하는 것이지 제3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를 대신하여 용서를 해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상생활에서 예를 하나 들어 본다면
형이 동생에게 큰 잘못을 한 일이 있어서 자신에게 잘못한 형을 동생이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동생을 대신하여 용서를 해 줄 수는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용서를 해 주었다고 형이 동생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동생은 당장 아버지에게 따질 것이다.
아버지가 무슨 권한으로 내가 해 줄 용서를 해 주었는가 하고.....
만약 그 형이 이렇게 말한다면 동생은 더 기가 막힐 것이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이 많이 괴로웠지만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그 잘못을 뉘우치고 나서 맘이 많이 편해 졌다. 그러니까 지금 너도 그로 인해서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거라”
아버지는 아들인 동생의 허락 없이는 용서를 해 줄 수도 없고 해 주어서도 안 되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형을 대신하여 동생에게 용서를 비는 것과, 동생에게 형을 용서해 줄 것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부탁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그 유괴범을 용서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유괴범이 참회를 하게 만드는 것과, 그 어머니를 찾아와서 위로하고 그 유괴범을 용서해 주라고 부탁하는 것 이외는 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법도라고 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초월해서 있지도 않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 법은 지켜지지도 않을 것이며 인간들로부터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를 지은 자는 오로지 당사자에게만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뿐이며 당사자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일은 마음에 새기면서 그에게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죄를 지은 자가 아무리 회개를 했다고 하여도 어떻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가 편안해 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상당하는 탕감을 치르고 난 뒤일 것이며 무엇으로도 탕감이 되지 않는 죄를 지었다면 그는 편안해 질 수 없는 것이며 편안해 져서도 안 된다.
피해자의 회복이 불가능한 죄 - 살인죄나 상해죄 강간죄 등- 를 지었다면 그는 아무리 법에 정한 형을 살고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는 떳떳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그는 잘못된 그 무엇 그것이 교리이든지 사상이든지에 의해서 양심이 마비당한 것이다.
누구에게든 지었던 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만 하면 얼굴이 붉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이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가 부모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마음에 평안함을 얻는다면 그는 철딱서니가 없거나 양심이 마비된 자가 아니겠는가?
양심이 있는 자라면 아무리 부모가 용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만 생각하면 그는 어둠속에 있더라도 얼굴이 붉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미 정상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용서는 오로지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설령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제3자는 용서의 권한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양심의 가책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의 양심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이 다 용서를 하고 하나님이 용서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양심은 그 죄를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다는 핑계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일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그 상처를 볼 줄 모르며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눈물로 용서를 빌 줄 모른다면,.
용서를 하는 자와 용서를 받는 자와의 만남에 눈물이 없다면,
더구나 용서를 받는 자가 용서를 하는 입장에 서 있다면,
용서를 하러 간 당사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런 모습을 이해를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보는 독실한 종교인(기독교)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벌레 이야기 라는 단편은 아주 짧습니다.
다운 받아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소설과 영화는 말하고자 했던 의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암이 엄마를 위로하고 설득하는 김집사가 싫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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