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이나 부활이나 윤회는 일단 죽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을 가거나 극락을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천국이나 극락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다시 오는 재림주님을 만나야 하고 불교인들은 자신의 당대(當代)에 전생의 업장까지 소멸하고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1.기독교에서 부활을 주장하는 이유
기독교인들 중에는 죽으면 곧바로 천국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반드시 재림하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천국생활을 살아서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람들을 멀리 묻지 않고 부활하기 쉽도록 교회 밑이나 교회의 뒷마당에 얕게 묻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만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의 본래의 교리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원죄(原罪)로 인해 육신의 죽음이 왔으며 그 죄는 부모로부터 유전이 되어 오고 있어서 인간은 스스로 그 죄를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죄를 탕감하기 위해서 구세주를 보냈고 인간들이 구세주를 통해서 원죄를 청산 받아야 하는데 2천 년 전에 온 예수님은 원죄를 믿는 자들에게 원죄는 청산해 주었지만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과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지는 않고 가버렸기 때문에 그 일을 하러 다시 오는 것이 재림(再臨)이다.
그래서 다시 오는 재림주님을 만나게 되면 죽었던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로서 기독교인들은 휴거(携擧)현상을 통해서 영원히 공중으로 들려올라가서 살겠지만 주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심판을 받아서 다 죽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이 내용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부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죽어있어야 한다.
2. 불교(동양의 종교)에서 윤회를 주장하는 이유
윤회에 대해서 이해하기 전에 먼저 불교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불교와 힌두교는 한 뿌리이며 불교와 힌두교의 관계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석가가 힌두교의 어느 교파에 속해있었던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힌두교는 석가가 태어나기 몇 천 년 전부터 있어왔던 종교로서 인도의 모든 사람들이 힌두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석가 또한 힌두교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가가 28세 때 생노병사를 고민하여 왕궁을 떠나 도의 길을 찾아 나섰지만 힌두교의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을 주장한 개신교처럼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로 인해서 나중에 핍박을 받고 인도에서는 결국 정착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지금도 인도에는 불교의 유적만 있을 뿐 신도들도 없고 사찰도 없다.
윤회사상은 불교에서 석가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고 힌두교에서부터 유래된 사상으로 이 사상은 사실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데 이용되어 왔던 사상이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세습이 되어서 세탁을 하는 집안은 대대손손 세탁을 하고 똥을 푸는 집안은 대대손손 똥을 퍼야 하며 직업을 바꿀 수도 없고 다른 계급으로 옳겨 갈 수도 없으며 다른 계급과 혼인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지금도 수천 년 동안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런 불합리한 숙명을 받아 들이는 것은 바로 윤회사상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만 다음에 태어날 때는 보다 높은 계급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고생을 하는 것을 전생의 업장을 소멸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가는 왕족이었으니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왕족) 바이사(상인.평민), 수드라(천민)의 네 계급 중에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했을 것이다.
참고로 달리트라고 불리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은 천민 아래 있는 사람으로 계급도 없으며 짐승(소)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아 온 사람들이다.
본래의 윤회사상은 사람들이 선량한 삶을 살도록 권유하기 위함이었지만 힌두교에서는 기득권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회(輪回)를 하는 목적과 윤회를 하는 방법은 인간이 본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의 업장(業障) 때문에 태어난 것으로 그 업장을 소멸하여 무(無)의 상태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사는 동안에 업을 소멸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 업을 소멸할 때까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계속 거치게 되는 것으로서 인간으로 사는 동안에 업을 소멸하는 삶을 잘 살았다면 보다 업을 소멸하기 쉬운 조건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면서 자신이 태어난 것이 전생의 업장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업장을 소멸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현생의 업장이 더 해져서 짐승으로 태어난다든가 아니면 더 조건이 좋지 않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업장이 소멸될 때까지 반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업장이 소멸될 때까지 반복해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며 결국 윤회의 목적은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으로 업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깨끗한 옷에 묻은 더러운 때라고 한다면 그 때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 행구는 행위를 윤회라고 보면 업장과 윤회의 관계가 이해가 될 것이다.
3. 윤회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
무신론자 곧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런 논의 자체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는 과연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하는 문제이다.
생각할 능력이나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성인이 되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이나 윤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실지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믿고 싶겠지만 현대인의 상식으로서는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을 결국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윤회' 나 '부활'은 없다.
윤회나 부활로 알고 있는 것들은 다 같은 영적 현상의 하나로 살아온 환경과 종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회를 확신하는 불교인들이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수긍을 할 수 없는 입장이겠지만, 지난번 올린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윤회라든가 부활이라든가 하는 것이 인종과 종교에 따라 다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다 같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서양이나 어떤 종교를 불문하고 윤회를 하게 되면 다 같이 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고 부활을 하게 되면 다 같이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윤회를 하게 된 그 법칙이 부활로 바뀐다거나 부활이 윤회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윤회(輪回)' 라는 말과 '부활(復活)'이라는 말이 의미는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영적(靈的)인 현상을 잘 못 이해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궤변을 읽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윤회의 내용과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먼저 이해를 해야 하는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생각해 본다면
그러면 부활(復活)이란 개념을 단순한 죽은 육신이 살아나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개념을 확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사실 부활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보편화(?) 된 의미로서의 부활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런 부활은 기독교와 회교 등에서 가장 열렬히 믿고 있으며 이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부활이라고 하면 죽은 육신이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부활은 땅 속에 들어 있던 씨가 봄에 싹이 나는 것을 포함해서 활동이 멈추었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부활의 개념에 포함될 것이며,
병이 들어서 죽어 가는 상태에 있다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과정이나 병이 나은 그 자체도 부활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나쁜 상태에 있던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온전한 정신을 가지게 된 그 자체도 부활이며 조폭 같은 깡패가 개과천선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선한 사람이 되는 과정과 그 결과도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관은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회교도들도 부활을 믿으므로 예수만을 믿어야 부활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생각이다.)이 죽으면 영혼은 영계(천당)에 가 있다가 어느 때가 되면 없어진 육신 속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그 육신으로 부활한다고 믿는 것으로 이집트의 미이라도 그런 소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활의 목적은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인간이 본래는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되었으나 죄(윤회의 입장에서 보면 업)를 지어서 불행하게 되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어느 때가 이르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예수나 마호메트)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윤회의 목적은 본래의 목적(그 목적이 무(無)로 환원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도 부활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회나 부활이나 궁극적으로는 본래의 목적대로 복원(復原) 내지 환원(還元)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의 근본개념은 타락함으로 죽었던(원죄를 가지게 되었던) 인간이 구세주를 통해서 죄가 청산되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4. 윤회와 부활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윤회나 부활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먼저 그 윤회나 부활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영과 육이 결합한 존재로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영혼을 담고 있으며 육신은 수정되는 순간에 시작되어 10개월 모태에서 형태를 갖추고 태어나서 20세 전후하여 성장을 하고 그 이후부터는 노쇠해지기 시작하여 한 60년이 지나면 육신은 활동을 멈추게 되고 육신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태어나는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담겨져서(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첫 숨을 내쉬는 순간일 것이라는 본인의 생각임) 육신과 함께 성장을 하는데 육신은 20세가 되면 성장을 멈추지만 영혼은 죽을 때까지 성장이 멈추지 않으며 육신이 숨을 거두게 되면 성장을 멈추게 된다.
과일나무의 과일은 그 과일은 나무에 달렸을 때 완전히 익어야 하며 과일이 익기 전에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과일은 영원히 익을 수가 없다.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관계도 이와 같아서 영혼의 성장은 육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게 되며 영혼의 성장은 세상의 모든 것(사람과 만물 모두)을 사랑하고 또 선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므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랑의 열매를 완성하게 되면 과일이 익으면 저절로 나무에서 과일이 떨어지듯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영혼이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의 길이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므로) 영혼의 성장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이 늙어 죽을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의 모습은 벌레 먹고 찌들은 풋과일의 모습과 같이 볼품없는 불량품 영혼이 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영혼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 영혼의 사랑이라는 원소를 통하여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중간에 죽는 경우가 허다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과일이 바람이 불어서 익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일은 영원히 익을 수 없다.
살인을 하는 것은 나무에 달린 과일을 강제로 따는 것과 같은 것으로 다른 사람의 영혼의 완성을 방해하는 행위로 그 행위는 어떻게든 용서가 될 수 없는 행위다.
5.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육신을 떠난 영혼은 영계로 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완성하지 못한 불량품 상태인 영혼은 영계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영계로 가기 위해서는 더 완전한 영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은 다시 그 나무에 붙어서 익을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육신을 떠난 영혼은 영혼의 완성을 위한 육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영계에서 자기 영혼의 완성을 위하여 어떻게든 지상에 있는 후손이나 친지 그리고 자신과 조그마한 인연이 있는 지인(知人)에게 구조의 손길을 벌리게 된다.
계시를 통하거나 꿈을 통하거나 아니면 영매(점쟁이나 심령술사)를 통하거나 해서 자기와 연관된 사람들이 보다 선한 생활과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협조를 해서 그 혜택으로 보다 나은 영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영인들에 의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영적인 일들은 이런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선한 영인들은 지상인들이 선한 생활을 하도록 긴 세월 동안 협조를 하면서 기다리지만 악한 영인들은 지상인들에게 협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지상인들을 협박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데, 악한 영인들이 직접 지상인들을 공격하고(빙의로 미치게 한다거나 병을 앓게 하는 일들) 영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지상의 어떤 한 사람에게는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가 간 영인들이 위와 같은 목적으로 지상인이 알게 모르게 협조를 하고 있는데 그 영인들의 생이 전생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며 그 사람들이 윤회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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