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잘 살아가는 이야기

원죄(原罪)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원죄는 허구(虛構)이다.

뿅망치 2017. 1. 26. 23:34

원죄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 목숨을 종교에 저당 잡혀서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병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여 그 말을 믿게 되면 그 의사에게 매여 살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윈죄론을 들여올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올린 글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원죄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원죄라는 단어의 의미는 인간이 맨 처음 지은 죄라는 의미와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종교에서는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두 번째 의미인 모든 죄의 뿌리라는 의미는 모든 죄의 기원이라는 의미로 인간들의 삶에서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모든 죄들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인간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종교에서 말하는 죄와 원죄의 허구성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종교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사실 죄가 아닌 것들이다.

인간의 본능과 관련되는 식욕 성욕 수면욕 소유욕 등 등...

시기하고 질투를 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 그리고 경쟁을 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인간들의 본능과 관련된 것들로 본능의 발로로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타락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이 생존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원죄를 청산했다거나 처음부터 원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원죄 없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라..

위에 들었던 시기 질투 욕심 이런 것들이 사라졌던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것들은 타락과 상관이 없는 본능이기 때문에 원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원리적인 생활을 하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것이 전혀 없어질 수 없는 것은 그것들 자체가 생존본능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종교 생활을 오래 하여 이런 본능적인 것이 소멸된다면 생존경쟁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되며 생존에 필요한 자원과 공간이 부족한 물질세계에서의 생존경쟁의 포기는 죽음과 직결되게 된다.

설령 생존에 필요한 자원과 공간이 무한정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계에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지 않으면 종의 생존능력이 퇴화가 되고 멸종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도 물질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은 자연계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성서가 쓰여질 때나 신약이론을 정립할 때 그리고 원리가 쓰여질 때 지금과 같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발달되었다면 타락이니 원죄니 구원이니 하는 이런 내용들을 언급하거나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지금 우리가 보는 종교는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명상이나 기(氣) 수련 같은 것을 통해서 신을 찾아가는 그런 방법들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모습이 현재의 과거 인간이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했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생존경쟁을 통한 삶이었으며 미래도 이런 생존경쟁을 통한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어느 정도 조절과 통제는 가능하지만 이런 생존본능의 결과로 나타나는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을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동물세계나 식물의 세계를 보더라도 그들은 종간(種間)의 생존경쟁이 치열하며 같은 종 안에서도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경치와 휴식을 제공하는 숲도 그 속에서는 나무는 나무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다.

 

그들의 생존경쟁에는 시기 질투 약탈 살육 등 등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내용들이 모습으로 발생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매스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타락한 적도 없고 따라서 죄를 지은적도 없지만 생존을 위해서 인간들이 죄라고 규정한 행동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은 생존경쟁으로 야기되는 문제점들을 최대한 이성과 지성으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만이 다를 뿐 다를 바가 없다.

 

생존의 본능에서 발로되는 현상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죄로 규정하다다 보니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원죄론을 등장시키게 된 것이다.

잘못된 이론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기 위해서 도입된 이론은 잘못된 이론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천동설을 설명하거나 보조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어떠한 이론일지라도 천동설이 진실이 아니고 허구라면 그 이론이 이론 또한 허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상식적인 사람들 중에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생존본능으로 야기되는 현상들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본능의 발로가 타인과 상충이 될 때 이성과 지성으로 조절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타인의 권익을 침해했을 때 비로소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죄가 아닌 실생활에서의 법에 저촉되는 죄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은 사실 죄라고 할 수 없으며 무지한 사람들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해 놓은 도구에 불과한 것인 것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무고한 죄인을 만들어 놓고 갈취를 하는 행동들은 악랄한 행위에 해당하는 셈이다. 범죄조직에서 많이 하는 행동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한 수단이 종교에서 원죄를 뒤집어씌우는 수단과 비슷한 내용들이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놓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원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지옥을 간다’ 라고 협박하는 종교의 모습이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본능에서 유추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지(無知)의 소치(小癡)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며 판단력과 용기가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것이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기고 있고 수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혀짧은 이론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대의 신학자들....

그 사람들도 이런 이론들 믿지 않는다.

신학자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은밀하게 물어보라...

원죄설을 믿는가 하고...

그 사람이 양심이 있고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하거나 알면서 그런 것을 물어보시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