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도 30일 배낭여행

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드 30일 여행기(85)...티무르의 고향 샤흐리삽스와 무덤에 대한 전설 같은 실화

뿅망치 2025. 2. 15. 23:18

샤흐리삽스는 페르시아말로 녹색(綠色)의 도시 라는 뜻이라고 하며 기원전부터 있었던 도시로 아케메네스 제국이나  소그드 시기

를 거쳐 티무르 제국 시기에 티무르는 이곳을 수도로 만들고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으면서 본

인의 무덤도 그곳에 있게 되었다.

 

그라나 티무르가 1370년 제국을 세운 뒤 악 24년에 걸쳐서 악 사라이 궁전을 건설하였고 가족의 무덤들도 이곳에 있는데 악사라

이 궁전은 16세기 부하라 칸국의 압둘라 칸 2세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아치가 떨어져나간 정문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스페인의 사절 클라비호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궁전을 보고 놀랐다고 여행기에 썼다고 하며 중앙아시아

최대의 문이라고 알려진 이 문의 현존 높이는 38m이지만, 아치까지 합치면 50m는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기둥에는 "만약 너희들이 우리의 힘을 확인하고 싶거든 우리의 건축물을 봐라"고 써있다고 한다. 

현재의 샤흐리 샵스는 인구 10여만 정도의 소도시이나 샤흐리삽스는 2000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도시이기도 하다.

 

샤흐리삽스에 도착해서 악사라이 궁전의 정문 기둥을 보면 그 거대함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 궁전을 허물고 기둥만 남겨 두고 

허물어 버린 것이 같은 이슬람종교를 믿고 있는 다른 왕조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궁전은 기둥만 남고 궁전이 있었던 터 위에는 정원이 만들어져 있고 그 가운데는 티무르의 입상(立像)이 서 있는데 그 방향이 남쪽

으로 자신의 고향 방향이 아닐까...

입상이 바라보는 곳에는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무덤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악사라이로 들어가는문....웨딩 촬영을 이곳에서도 많이 하는 듯...몇 커플을 보었다.

신부 친구들...정면에서 보지 못해서 미모들을 확인하지 못하고

일행 중의 두 사람...미인은 아니라고 귀엽게 생겼다.

악사라이 궁전의 정문이 보이고.....정문이 저러했다면 궁전도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저 위에 아치가 있었는데 우즈배키스탄족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그 아래 서면 위압감이 대단하다.

거대함에 놀라게 되고...

인위적으로 파괴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안에서 보는 정문

정문쪽에서 보는 아미르 티무르의 입상...웨딩 촬영하는 팀들이 사진을 찍는다.

우리도 입상쪽으로 걸어 간다.

입상 주변의 공원

악사라이 정문 위쪽에서 본 궁전터...지금은 공원이 되어 있다.

아미르 티무르이 입상(立像)...그가 테어난 고향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미르 티무르(1336.4.9.~1405.2.18.)의 본명은 '티무르 이븐 타라가이 바를라스‘ 라는 긴 이름인데 앞에 아미르가 붙은 것은 티무

르가 칭기즈칸의 직계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도 칭지즈칸의 자손들이 나라를 세웠을 때 붙이는 이름인 칸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되어서지배

자를 뜻하는 이미르를 붙이게 된 것으로 몽골제국 안에서는 직계만이 왕을 뜻하는 칸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가 있었고,

칭기즈칸의 직계 혈통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면 부마(夫馬)의 자격으로 구르칸이(kürügän)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었다.

티무르가 그렇게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도고 나라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티무르의 제국으로만 남아 있게 된 이유이다.

 

티무르는 모계 쪽으로 칭기즈칸의 후손이고 아버지도 칭기즈칸의 혈족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몽골족이기는 하지만 페르시안계의

혈통도 섞여 있어서 혼혈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구소련이 티무르의 무덤을 열고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소련의 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티무르의 두개골을 토대로 복원한 흉상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이 죽고 난 뒤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던 나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전쟁을 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서 멸망하거나

다른 왕조들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게 되었다.

티무르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나서 자리를 잡은 티무르는 칭기즈칸이 건설한 대제국을 회복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정복활

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이슬람 종교인이었지만 명목상으로 칭기즈칸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이슬람국가도 서슴치 않고 정복을

하였고, 종교와 상관이 없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슬람인들도 저항을 하건 항복을 하건 사정없이 살육

도 하는 잔인한 정복자였다.

 

그는 칭기즈칸이 자신의 롤 모델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정복방법과 치세방식을 따랐으며 그렇게 해야 몽골족들의 지지

를 받고 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기반을 집은 곳이 트란속사니아 (Transoxania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우즈

베키스탄 대부분지역)로 이곳은 이슬람종교가 이미 뿌리를 내린 지역으로 이슬람 지도자로서의 술탄의 역할도 하는 입장에 있었

다.

 

그리고 그는 트란속아니아 지방을 정복할 때는 관대한 정복자였으나 그 이외의 지역을 정복할 때는 잔인한 정복자로서 그가 정복

하는 곳은 약탈과 학살이 항상 일어났으며 그가 전쟁했던 기간 동안 학살했던 인명이 1,700만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는 문맹이었으나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종교학자들과 토론도 가능할 정도로 지성적인 사람이었

으나 정복하는 곳마다 저항이나 항복여부를 불문하고 그곳을 폐허로 만들고 남자들은 학살을 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파는 등 악랄

한 행위를 많이 한 정복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티무르와 전쟁을 했던 기독교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제외한 이슬람국가에서도 티무르는 약탈자와 살인자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았으며 마지막도 칭기즈칸이 세운 원나라를 초원으로 쫓아낸 중국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원나라를 수복

하러 가는 도중 1405년 69세의 나이로 병사를 하면서 40년에 걸친 그의 정복(征服)의 여정은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세운 제국도 사후 100년이 채 되기 전에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분열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의 후손인 바부르에 의해서 그가 학살과 약탈, 그리고 폐허로 만들었던 인도의 델리에서 무굴제국이 세워지

게 된다.

아미르 티무르의 전쟁 원정로

생전의 티무르 제국... 이후 그의 아들 샤 호로에 의해서 제국이 더 확장되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그리고 신혼 신부들...몇 쌍을 보았다.

동상은 오른쪽 다리를 짧게 만들었다고...바라보는 곳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호자 일가르(Hoja Ilghar)라는  그가 태

어난 마을일 듯

이 입상에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많이 찍는다.

티무르가 바라보는 곳에는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그의일가들  묘가 있는 콕 굼바즈도 있다.

좀처럼 얼글이 들어간 사진을 찍지  않는데...어떻게 찍게 되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들이 자주 눈에 띤다.

우즈베키스탄에는 김태희와 전지현이 밭을 멘다는데...아쉽게도 그런 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악 사라이(Ak-Saray Palace)  왕궁터 안에 있는 카페나 식당이 있는 곳의 회랑

분수대...

왕궁의 유물...목욕탕 자리??

공원 외부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

 

그의 무덤의 개봉과 관련한 전설같은 실화...믿거나 말거나가 이니고 믿을 수밖에 없는 

    

1941년 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이제 준비는 끝났다.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명을 받고 지난 10년 간 조사와 준비를 해 왔다.  

이제 중앙아시아로 가서 아무르 티무르의 무덤을 열고 유해만 가져 오면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타지키스탄 출신의 중앙아시아 역사학자 아이니(S. Aini)  

저명한 동양 고대-중세 사학자 세묘노프(A. A. Semyonov)  

소비에트 고고학계의 거두인 게라시모프(M. M. Gerasimov)  

촬영 담당 영화 감독 말릭 카유모프(Malik Kayumov)  

이들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향해 비행기를 출발시켰다.  

 

1941년 6월 16일,  

 

구르아미르(Go'r Amir)에 도착한 일행은 지하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전기장치와 기중기를 설치했다.  

과연 500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 유해는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일까?  

먼저 아무르 티무르의 관 주변에 있는 아들 샤흐 루흐와 손자 미르조 울루그벡의 관을 열기로 했다.

 

있었다.   

유해는 잘 보존돼 있었고 큰 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울루그벡은 살해된 사람은 수의가 아닌 살해 당시의 의복

그대로 매장하는 관습에 따라 수의가 아닌 왕의 일상복을 입은 모습 그대로 였다.

 

   <기중기로 관을 들어 올리는 연구팀-기록영상 화면 캡처>  

      

이제 아무르 티무르의 관을 열 차례...  

이런, 기중기가 말을 안 듣고 딱 멈춰 서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손으로라도 관을 열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갑자기 전기까지 나가버렸다.  

일순간 모두에게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찰나, 허름한 차림의 노인 3명이 지하 묘실로 들어 왔다.

      

"이 보시오, 이 관을 열면 전쟁의 혼을 풀어 놓는 것이오. 여태껏 보지 못한 잔인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오.

여기 책에 그리 적혀 있지 않소? 당장 그만 두시오." 노인들은 책을 펼쳐 보이며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르 티무르의 목관-기록 영상 화면 캡처>  

 

연구팀의 참모는 그들을 쫓아 내고 작업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한 학자가 그 책이 필요하다 생각해 묘실을 나간 노인들을 급히 따라 갔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때가 1941년 6월 20일 오후 3시였다.

 

드디어 아무르 티무르의 관은 열렸고 석관 내부에는 다시 소나무로 만든 목관이 들어 있었다.  

관을 뜯어내고 유골을 수습한 연구팀은 모스크바에 무전을 하고 아주 간만에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1941년 6월 21일 새벽,

 

갑자기 숙소에 나타난 사마르칸트 지역 공산당 간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라며 외쳤다.  

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도 정확하게 노인들의 예언대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르 티무르의 유골은 모스크바로 이송됐다.    

 

전쟁은 비극 그 자체였다.  

히틀러와의 불가침 조약을 신뢰했던 스탈린은 세계 대전의 참화 속에도 소련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전쟁은 일어났고, 붉은 군대는 독일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밀리고만 있었다.   

6개월 간 계속된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에서만 200만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밀리기만 하던 와중에,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 주코프(G. Jukov) 장군은 아무르 티무르의 유해 발굴 현장에 촬영 감독으로

 참여했던 말릭 카유모프에게서 3명의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다. 노인들이 했던 예언대로 아무르티무르의 무덤이

 열리고 전쟁이 났다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은 주코프 장군...  

 

장군은 수화기를 들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우연이든 아니든 불길한 내용임에 틀립없습니다. 사실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 발생했고 소련군은 계속해서 밀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일단 그의 관을 닫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분명 아무르 티무르의 저주입니다."

 스탈린은 많은 고민을 한 후 그의 말을 수용했다.

      

1942년 12월 20일,

 

공산체제하의 소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대한 이슬람식 의식과 함께 아무르 티무르는 다시 자신의 관으로 들어갔다.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개전 이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붉은 군대는 아무르 티무르의 관이 다시 닫히고 나서 이틀만에 첫 승리를 거두고

그 이후 계속 승승장구해서 독일군을 몰아내고 승전국이 된다.  

 

1943년,

 

소련 공산당은 100만 루블을 사마르칸트로 내려보내 구르 아미르를 완벽하게 복원하라 명한다.  

여전히 전시 상태이던

 당시에 100만 루블은 탱크 16대를 구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상의 사실은 당시의 촬영을 담당했던 감독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주민들은 그런 영력있는 아무르 티무르를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 다시는 아무르 티무르 대왕의 관이 열리는 저주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인너넷에서...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역시 그는 전신(戰神)임이 틀림없다.

위의 내용들은 위키 백과에서도  등재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시신의 확인을 통해서 전승으로만 전해지던 티무르가 오른쪽 절름발이 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