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도 30일 배낭여행

카라코람하이웨이 그리고 실크로드 30일 여행기(87)..고구려 사신의 그림이 있는 아프라시얍 벽화 이야기

뿅망치 2025. 2. 19. 08:56

아프라시얍...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이 사마르칸트의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었으나 칭기즈칸이 이곳

을 침공하면서 완전한 폐허를 만들었다.....칭기즈칸이나 티무르 등은 무식한 약탈자였을 뿐 역사에서 높게 평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프라시얍을 온 목적은 아프라시얍 궁전벽화에 고구려인의 복장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그것을 보기 위함이다

대한민국에서 2년에 걸쳐 복원한 그림...오른쪽 조우관(鳥羽冠)과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찬 사람이  고구려사람일 것이라고 

 

아프라시얍 언덕에 도착한 시간이 네 시 반으로 아프라시압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언덕에 가축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냥 황무지가 되어 있고 왕궁터에 박물관 하나가 만들어져 있다.

박물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우호협력비...이곳에서 발굴한 것을 복원하는데 참여하였다.

박물관 옆에 있는 실크로드를 가는 대상들

 

곧바로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제일먼저 비디오를 상영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비디오라고 한다.

비디오 상영이 끝나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현지인 가이드가 나와서 아프라시압의 역사와 아프라시압궁전의 벽화에 대해서 설명

을 해 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굴되어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는데 그리 관심들이 없어 보인다.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려면 일단 세계사 등 관련 학문분야에 관심과 흥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원된 그림...한국에서 복원한 것이라고...

동서남북의 벽면에 있는 벽화로 뒤에 있는 벽화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구려 사신이 있는 벽면의 그림...

 

그런데 고구려 사신이 6천키로가 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사신 행렬도를 그릴 때는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의례적으로 그려 넣었을 것이라고 한다.

오른쪽에 고구려 사신이 보인다.

위의 그림을 정리하여 그려 놓은 것으로 이 벽화들은 왕궁의 접견실에 있었던 그림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그림이 왕의 권위를

높일 수도 있고 사신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사람이 스스로 소그드인의 후예라고 하는데....아프라시얍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로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사마르칸트...당시의 이름은 마라칸다였다.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이곳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인데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글씨들이다.

그리스(마케도니아)와 연관된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출토된 도자기들

생활용품들...우리나라의 고드렛돌과 같은 것으로 돚자리를 엮을 때 쓰는 돌인데...이돌도 그런 용도로??.

실크로드 속의  사마르칸트

곡식 항아리

빨리 지나가느라고 자세히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두골??  세번째 두골이 머리가 긴 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세계 여러곳에서 이런 두골이 발굴된다.  이런 두

골이 우리나라의 신라에서도 발견이 되었다.

석관?...

자세히 읽어 볼 시간도 없고...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의 브리나탑에서 본 발발석의 모습과 흡사하다.

 

1965년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 길이의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외교를 묘사한 서벽에는 차가니안, 차치, 티벳(추정), 투르크, 당, 고구려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려져 있어 이 지역

이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했다. 이 중 고구려인의 존재는 한국인들보다도 먼저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이 증명하며 한국 학계와 언론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려 600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나타났으

니, 역사학계 뿐 아니라 이 지역과 긴밀한 공조를 원하는 대한민국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역대 한국의 대통령이 모두 직접 방문했으며, 2013년과 2014년에는 한국에서 문화 ODA사업을 통해 현지 아

프라시압 박물관과 협업하여 디지털 기술을 통한 벽화와 벽화 궁전의 복원에 성공했다. 10분 분량의 컴퓨터 그래픽 영상과 가상현

실(VR), 증강현실로 제작된 복원 결과물은 현지 박물관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나무위키 백과)

 

한국에서 만든 상영물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궁전 벽화가 발견되었던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군데군데 발굴흔적과 벽화가 발굴되었던 곳에 검은 돌로 만

들어진 표지판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이다.

몽골이 이곳을 침략하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라시얍 정착지( Afrasiyab Settlement Site)

벽화가 발굴된 곳의 표지판

언덕에서는 주변이 한 눈에 보인다....주변에는 산이 없다.

뒤에서 보는 박물관

앞에 보이는 언덕의 흙무덤이 다 사람이 살던 곳인데...몽골군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아프라시압은 몽골 침입 이전 사마르칸트의 구도심(舊都心)이기 때문에 13세기 이전 사마르칸드트의 역사가 바로 아프라시압의

역사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처음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이곳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일부였다가,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

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때 알렉산드리아의 일부가 되며 헬레니즘이 번성하기도 하였다.

당시 명칭은 마라칸다였었다. 이후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조로아스터교가 번성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오랜

시간 받은 덕분에 이후 지배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이곳의 주민은 이란계 타지크인들(중앙아시아에 사는 백

인)이 절대 다수이다. 기원 후에는 주로 소그드인(Sogd)이라 불리며 도시국가 연합체인 소그디아나를 구성했다. 이 지역은 실크로

드의 중심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서 문명의 충돌지이면서 동시에 상호교류하고 무역하는 허브 도시로 기능했다.

 

7세기 무렵부터 이 지역은 신당서(新唐書) 등의 중국 기록에 강국(康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투르크(돌궐)와 당나라의 영향

을 강하게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인 아프라시얍 궁전벽화에서는 총 4벽면 중 서쪽 벽면에 소그디아나의 지배

자(바르쿠만Varkhuman, 신당서의 불호만으로 추정)를 접견하기 위해 유라시아 각지에서 찾아온 사절들과, 지배자와 함께 이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투르크(돌궐)인 권력자들이 등장하고, 북쪽 벽면에는 온통 당나라 황실과 관련된 도상들이 등장하며 당서의 책봉

기록과 일치하는 점을 보여준다. 8세기에는 아랍 세력의 침공(고선지의 탈라스 전투가 이 근처에서 이뤄졌다)으로 중국의 제지술

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거점이 되었으며, 이후 완전히 아랍문명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랍 세력의 지배 아래서도 아프라시압 도성

(都城)은 국제무역도시로서 눈부시게 번영했지만 13세기 발흥한 몽골의 침략 아래 아프라시압은 이름만 남긴 채 완전한 폐허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완전히 잊혀져 있다가 1950년대 양치기 목동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옛 유물을 통해 구 소련이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가

게 되면서 아프라시압 도성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전술한 이러한 역사성에 힘입어 아프라시압 도성을 포함한 신, 구 사마

르칸트드 전체가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사마르칸드 - 문화교차로'로 등재되게 된다.

 (나무위키 백과에서) 

이곳을 내려가서 샤히진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