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건물들
아마도 등인 듯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에서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티무르의 손자 울르그 벡이 자신의 아버지 샤흐루 왕을 기리기 위해
1437년에 만든 콕 굼바즈 모스크(Kok Gumbaz mosque) 가 나오는데 콕 굼바즈는 푸른 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안에 들어가면 여느 돔들과 마찬가지로 아라베스크 모자이크가 수놓아져 있는데 돌로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아니고
그림으로 그려진 모자이크여서 물감이 바린 곳도 있고 벗겨진 곳도 있다.
콕 굼바스 쪽으로 걸어간다.
정자...
앞으로 이런 기둥들을 건물들에서 많이 보게 되는데...기둥이 여러개의 기둥이 겹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
굼바스의 모양을 하고 있는 카페
멀리 악 사라이가 보인다.
콕 굼바스... 오른쪽이 모스크이고 왼쪽이 티무르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을 모신 영묘이다.
콕 굼바즈로 들어가는 문
이곳도 마당에 허브를 잔뜩 심어 놓았다.
들어온 문 입구...오른쪽이 명상의 집이며 영묘이다.
콕 굼바즈 모스크 입구
돔 내부...천정의 무늬들이 벗겨져 있다.
모자이크가 아니고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모스크 뒷쪽의 마당에 있는 무덤들...앞에 보이는 건물은 도루스 사오다트 복합건물(Dorus Saodat complex)이다.
사원의 뜰 안으로 들어가면 '명상의 집' 이란 뜻의 도루트 틸로밧 건물이 있는데 두 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티무르의 스승과 아버지의 영묘이다. 그중 오른쪽의 영묘에는 4개의 무덤이 있는 데 그 중 한 무덤돌 중 한쪽이 패인 곳이 있다.
도저히 물이 생길 곳이 없는 곳에서 항상 촉촉히 젖어 있어 성수라고 믿어 아픈 곳에 바르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콕 굼바즈 모스크 안마당에서 왼쪽은 아미르 티무르 아버지의 정신적 스승인 세이흐 삼세진 쿠랄의 영묘로 1374년 티무르가 지었다.
또한 안마당 오른쪽에는 굼바스 세이단으로 1438년 울루그벡이 그의 후손들을 위해 영묘로 지었다.
도르트 탈로밧에 붙어 있는 영묘 안에 있는 광....이곳에 습기가 서려서 물이 찬다고 하며 이 물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이 홈은 그릇으로 물을 퍼서 닳아져서 생긴 홈???
이곳의 돔의 천정 그러고 보니 습기가 차 있는 것 같다.... 이습기가 관으로 떨어져서 물방울이 생긴 듯
신기한 듯 손으로 만져보고
사원 안에 있는 가게들..
콕 굼바즈에서 나와서 아담하게 만들어진 정원을 지나면 도루스 사오다트 복합 건물(Dorus Saodat complex)이 나오는데
이 거대한 단지는 지배자의 가족과 친족을 위한 묘지・기도실・모스크・종교 공동체와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도 포함한 복합 건물이다.
이곳은 시간이 없어서 겉만 둘러보고 사마르칸트로 되돌아 오기 위해서 우리를 태우고 왔던 차량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간다.
앞에 보이는 도루스 사오다트 복합건물(Dorus Saodat complex)로 가는 사이에 있는 정원
이곳도 웨딩드레스를 입은 커플들이...
또 다른 커플
건너편에서 본 콕 굼바즈 사원과 도루트 틸로밧의 세개의 돔
하늘색 돔이 참으로 아름답다.
도루스 사오다트 복합건물(Dorus Saodat complex)은 티무르의 가족들과 친지들의 묘와 기도실, 모스크, 종교 공동체와
순례자들을을 위한 숙박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있는 건물이다.
왼쪽에 있는 나무는 뽕 나무로 이곳은 뽕나무가 수백년 된 나무들도 있는데 ..나무 그늘에서 가방들을 판다.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정문(좌측)
어디에서 보아도 조화롭게 아름다운 세개의 돔
직접 보면 하늘 빛 콕 굼바스가 크기가 서로 달라서 단조롭지도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루스 사오다트 복합건물(Dorus Saodat complex) 쪽에서 본 돔
이 때가 거의 두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으로 사마르칸트까지 가려면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여 가이드가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이 빵이 그 유명한 사마르칸트 빵이다.
이곳에서는 빵을 논이라고 하는데 달지도 짜지도 않은데 약간 찰진 맛이 난다.
이곳에서 만드는 빵이 맛있다가 보니 부하라의 왕이 제빵기술자를 데리고 가서 빵을 만들게 하였는데 아무리 해도
사마르칸트에서 만든 빵 맛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르칸트에서 밀가루와 물과 화덕을 가지고 왔지만 그 맛을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하라의 왕은 사마르칸트의 빵은 사마르칸트의 공기만이 만들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이 빵이 그 유명하다는 사마르칸트의 빵이다. 이곳에서는 빵을 논이라고 부른다고...
이곳에서 곧바로 귀국을 하면 좀 사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부하라와 히바를 가는 일정이 남아서 참았다.
사마르칸트로 돌아오고...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도프라는 전통 모자를 쓴 사람들
산에 공룡이...
올 때 보았던 아치이다.
독수리도...
사마르칸트 주변...길에 과일과 채소를 판다....가로수는 뽕나무다.
늦은 점심을 먹은 한국식당...이름이 식후경이다.
식사...무조건 1/n이다.
식당내부
이곳의 주소가 판좁 작스호나인가 보다.
사장님 명함...구글에 사진들이 활발히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아 아직도 건재한 듯...
아래는 티무르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관심있는 분은 읽어 보시길....
정복자 티무르 바를라스는 청아 출판사의 내용이다.
모험과 방랑의 청년 시절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각주2) 출신이다. 이곳은 인류가 일찌감치 정착한 지역 중 하나로 '문화의 교차로'라고
불리는 고대 도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한다. 약 3,000년 전 소그드 인들이 세운 이 도시는 처음부터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교역을 통해 풍요로웠던 이 지역은 차례로 페르시아, 알란, 마케도니아, 훈, 튀르크, 몽골과
같은 강력한 이웃들의 침략을 받았다.
이 지역의 패자는 수십 번 바뀌었지만 트란스옥시아나는 언제나 침략자들을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관대한 땅이었다.
티무르 역시 한때 그곳을 침략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가 속한 바를라스 씨족은 튀르크의 한 계열로
칭기즈 칸이 호레즘 샤 왕국과 싸우기 위해 이 지역을 침공했을 때 원정군의 일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그들은 위대한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Chagatai)가 트란스옥시아나를 포함하는 지역에 차가타이 칸국(Khanate)을 세우자
사마르칸트 남쪽 지역에 정착해 유력한 귀족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한 다른 동료 튀르크 인들을 비롯해 그 이전의
다른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이 지역의 문화와 관습에 동화되어 갔다.
티무르
티무르는 1336년에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샤흐리삽스(Shahrisabz)에서 태어났다.
샤흐리삽스는 페르시아 어로 '녹색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바를라스 부족의 족장이던 아버지 무함마드 타라게이(Muhammad Taragay)는
티무르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이후 티무르의 숙부인 핫지 베그(Hajji Beg)가 가문을 비롯해 이 지역의 튀르크 인들을 이끌었다.
바를라스 족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 유목민들이었지만, 곧 험난한 생활이 끝없이 반복되는 유목보다는 사마르칸트의
핵심 산업인 무역과 상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티무르의 시대 즈음해서 바를라스
족은 튀르크 인들뿐 아니라 여러 인종이 복잡하게 뒤섞여 구성되어 있는 사마르칸트 지역의 상인들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티무르에 대한 기록은 동시대에 기록된 사료를 포함해서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15세기 페르시아 문학과 역사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샤라프 앗 딘(Sharaf al-Din Ali Yazdi)이 1425년에 저술을 완료한 《승전기(Zafarnama)》가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이다.
티무르가 직접 저술했다는 《티무르 회고록(Tuzuk-i-Taimuri)》도 전해지지만 이 회고록은 후세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서술 내용은 대단히 정확하지만 티무르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굳건한 마음과 억센 신체의 소유자. 용감하고 겁이 없으며 바위처럼 단단하다. 농담이나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재치나 경박함으로는 그를 즐겁게 하지 못하며, 비록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오직 진실만이 그를 기쁘게 했다.
- 아흐마드 이븐 아랍샤(Ahmad Ibn Arabshah)
티무르는 지성, 정서, 가치관 등 여러 면에서 보통 사람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다.각주3) 문맹임에도 그는
세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전해지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이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그는 전투 중의
짧은 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도 역사나 문학 작품을 낭송하게 하여 감상하곤 했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페르시아 어로 쓰인 시였다.
'티무르(Timur)'는 튀르크 어로 '철(鐵)'을 의미한다. 그는 큰 키와 건장한 체격과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어린 시절 양을 훔치다 화살을 무릎에 맞아 다친 결과였다. 때문에 그는 '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의 서구식
명칭인 '태멀레인(Tamerlane)'은 페르시아 어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인 '티무르 이 랑(Timur-i-lang)'을 번역하다 생긴 오류였다.
티무르는 낭만적인 모험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바를라스 족의 지도자인 숙부 핫지 베그를 의식한 그는 고향을
떠나 외지로 떠돌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이 시절에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발흐(Balkh)각주4) 지역 아미르각주5) 의
후계자였던 후사인(Amir Husayn)을 만나 우정을 쌓으며 함께 모험을 즐겼다. 후사인은 명문가인 카라우나스(Qaraunas) 씨족
출신이다. 이 사람들 역시 바를라스와 마찬가지로 칭기즈 칸 시절에 동부 페르시아에 정착한 원정군의 후예들이다.
티무르와 후사인의 모험 중에는 차카타이 칸국이 볼가 강 유역에서 불가르 인(Bolgar)들과 전투를 벌일 때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일도 포함된다. 티무르는 이 원정과 이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천 명 남짓의 튀르크 젊은이들로
구성된 작은 기병대를 지휘했다. 이때 얻은 '전사'로서의 명성이 그가 위대한 정복자의 길에 들어서는 기반이 되었다.
티무르의 성장
이 시기 차가타이 칸국은 성립된 지 100여 년이 약간 지난 때였는데, 칸의 자리를 놓고 후계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차가타이의 직계 혈통은 1346년 카잔 칸(Qazan Khan)이 내전
중에 살해됨으로써 끊어졌으며 뒤를 이은 방계 혈통 출신의 칸들은 실권을 갖지 못했다.
그러자 '무굴리스탄(Mughulistan)'이라고 불리던 차카타이 칸국의 동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몽골 부족들이 이 지역
전체의 패권을 노리게 되었다.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는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이러한 순수 몽골 인 출신의
야심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중국의 신장자치구 동쪽 끝에 위치한 고대의 교역 도시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며, 야심에 걸맞는
군사력과 함께 정치적인 역량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트란스옥시아나 주민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칸의 암살로 이 지역에 리더십이 부재한 시기를 노려 침공을 감행했다.
투글루크의 침공은 막 스물다섯 살이 된 티무르가 권력의 길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후일 위대한 정복자가
될 티무르였지만 시작은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바를라스 족의 리더 핫지 베그는 겁을 먹고 몸을 피하면서
조카인 티무르를 전면에 내세웠다.
숙부를 대신해서 투글루크와의 협상에 나선 티무르는 전체 튀르크 인들과 다른 지역민들을 규합해서 침입자들과 일전을 벌이는
대신 재빨리 투글루크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 대가로 바를라스 족의 새로운 수장으로 인정받았다.
일단 트란스옥시아나를 제압한 투글루크는 발흐의 아미르가 된 후사인을 공격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남하했다.
투글루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사인은 간신히 전장에서 빠져나왔지만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한동안 극심한 약탈에 시달렸다.
한편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몽골 군이 철수하자 핫지 베그가 복귀했다. 티무르는 숙부에 대한 군사 행동을 기도했으나
병사들이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좌절되었고, 결국 숙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투글루크 티무르가 발흐 원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오자 상황은 다시 한 번 급변했다. 그는 원정 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튀르크 귀족들을 처형했다. 핫지 베그는 다시 한 번 도주하다가 암살되었다. 티무르는 암살자를 응징하겠다며
펄펄 뛰었지만 그 누구도 체포하거나 처형하지 않았다. 투글루크는 아들 일리아스 호자(Ilyas Khoja)를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세우고 티무르를 고문으로 임명했다.
이제 티무르의 출세는 보장된 듯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투글루크가 티무르를 일리아스 호자의 고문직에서 해임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발끈한 티무르는 친구인 발흐의 아미르 후사인과 동맹을 결성해서 대몽골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투글루크의 막강한 전력을 상대할 수 없던 두 사람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줄기차게 쫓겨다녔다.
그러나 1363년 투글루크가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티무르는 상황을 타개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티무르와 후사인은
일리아스 호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동안 수도원에서 신앙 생활에만 빠져 있던 차가타이의 후손 카불 샤(Khabul Shah)를
새로운 칸으로 세웠다.
티무르가 후사인의 누이동생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각주6) 투글루크를 계승한 일리아스 호자는
십대 소년에 불과했지만 사나운 전사였다. 그는 2년 후에 다시 한 번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다.
이번 전투의 영웅은 티무르와 후사인이 아니었다. 티무르와 후사인은 사마르칸트로 진격하는 일리아스 호자를 요격했지만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했으며 사마르칸트는 몽골 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사마르칸트의 주민들은 일치단결해서 침입자들에게 저항했다.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도중에 몽골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면서 일리아스 호자는 철수했다. 이로부터 3년 후에는 일리아스 호자가 실각하면서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무굴리스탄의 실질적인 위협은 사라졌다.각주7)
공동으로 광대한 지역의 통치를 맡게 된 두 명의 젊은 아미르 티무르와 후사인은 만사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후사인이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귀족들에게까지 중과세를 부과하며 동분서주하는 동안 티무르는 바로 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주머니까지 털었다.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던 후사인의
누이동생이 병으로 사망하자 동맹 관계는 파국을 맞이했다.
당시 후사인은 티무르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군대를 움직여 트란스옥시아나의
양대 도시인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확보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지극히 정복자다운 방식으로 간단하게 위기 상황을 타개했다.
과거의 약탈자들인 무굴리스탄의 몽골 인들을 다시 끌어들인 것이다.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후사인은 티무르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제야 티무르의 개성을 파악한 후사인은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근거지인 발흐로 물러났다.
티무르의 발흐 정복
그렇지만 티무르는 후사인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전 경고도 없이 국경선인
아무다리야 강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각주8) 기습을 당한 후사인의 주력부대는 큰 희생이 나기 전에 쿤두즈에서
항복했고 발흐는 포위되었다. 후사인은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으며 항복을 선택했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티무르는 그를 너그럽게 용서했을 뿐 아니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사인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한 사람의 무슬림으로서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티무르는 그를 축복했다.
그렇지만 실제 역사는 냉혹하게 흘러갔다. 《승전기》에 의하면 후사인은 이 순례 여행 도중 '티무르도 모르는 사이에
' 누군가에게 암살되었다. 역사서는 티무르가 이 암살에 관여했는지 확인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냉혹한 후속 처사를
기록하고 있다. 후사인에게 충성했다는 이유로 발흐의 주민들은 거의 완벽한 인종청소라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다.
정복자 티무르
트란스옥시아나로 국한한다면 티무르는 역사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경건하면서도 관대하고 현명한 통치자였다.
이 지역에는 무슬림인 타지크 인과 튀르크 인뿐만 아니라 몽골, 페르시아 인 등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이슬람 역사상 모든 칼리프와 술탄들 중에서도 가장 경건한 신앙을 가진 통치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신앙을 주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징으로 3개의 원이 서로 교차하는 '사히브 키란(Sahib Qiran)'을 내세웠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들이 종교를 초월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트란스옥시아나를 벗어나기만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는 자비를 모르는 무시무시한
정복자로 변신했다. 티무르는 자신이 오직 트란스옥시아나에 속해 있으며 오직 그곳만이 자신이 봉사해야 할 신성한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프가니스탄 병합이 마무리되자 그는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장장 35년 동안이나 계속될 티무르의 정복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티무르의 초기 군사행동은 트란스옥시아나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마르칸트는 여전히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지만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남쪽의 페르시아와는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북쪽의 킵차크 칸국각주9) 과는 이익을 분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페르시아는
시리아를 거쳐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킵차크 칸국은 사마르칸트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두 경쟁상대 중에서 페르시아가 먼저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는 강대국이었으며 오랫동안
트란스옥시아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종주국이기도 했다. 한 세기 전에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쿠빌라이 칸의 동생인
훌라구(Hulagu Khan)는 이 지역 전체를 정복해 강력하고 풍요로운 일 칸국(Il khanate)을 세웠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절대 권력의 진공상태가 되자 분열과 내분으로 인한 혼란이 한 세대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북쪽의 상황 역시 어수선했다. 킵차크 칸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로 유럽 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위대한 전사
'바투(Batu)'의 나라이다. 이 칸국의 지배자이자 바투의 후예인 '황금의 유목민(Golden Horde)'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군사력뿐 아니라 교역에 기반을 둔 경제력에서도 다른 세력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황금의 유목민
중앙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휩쓴 몽골(킵차크 칸국)의 병사들을 일컫는 말로, 13~14세기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교역을 위해 유럽 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 화를 불렀다. 황금의 유목민들은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노출되면서 티무르가 태어나던 시기를 전후해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러시아 인들을 위시해
몽골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원하던 여러 민족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황금의 유목민들을 대신해 그들의 먼 일가인 '백색의 유목민(White Horde)'각주10) 들이 이 지역을 재정복하러 나섰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러시아 인들에게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이들의 칸인 토크타미시(Tokhtamysh)가 티무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두 지도자 사이에 동맹이 이루어졌다.
티무르의 1차 정복 사업은 1380년에 시작되었다. 첫 번째 목표는 한때 황금의 유목민들에게 지배받던 흑해 연안의
아제르바이잔을 합병한 일로, 그리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토크타미시 칸의 백색의 유목민들과 합세해서
얼마 전까지 몽골 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의 패권을 탈취하려는 러시아 인들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 인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382년에 모스크바가 함락되었다.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
주민들의 신앙에는 관대했지만 다른 지역의 이교도들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점령된 모스크바에서 남자들은
학살되었고 여자와 아이 들은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 나갔으며 시가지는 폐허로 변했다. 티무르의 동맹자 토크타미시가
이 지역의 몽골 인 전체를 대표하는 '황금의 유목민들'의 칸이 되었다.
티무르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곧바로 남하했다. 이번에는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는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한 나라였지만 사분오열되어 있어 약 10만 명 정도의 규모인 티무르의 병력을 맞이해 변변한
방어도 한 번 하지 못한 채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지중해를 잇는 교역로 상에 위치한 교역의 중심지 니샤푸르와 주변 도시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모두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렸으며 도시들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티무르로서는 이 풍요로운 지역에 대한 약탈 자체도 대단한 성공이었지만 니샤푸르를 파괴함으로써 '구 실크로드(Old Silkroad)'의
남쪽 교역로를 무력화시킨 대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로써 트란스옥시아나는 동서 교역의 유일한 교역로로 남으며 교역
도시로서 입지가 강화되었다.
티무르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정복할 목표를 결정하면 여러 해 전부터 좋은 말을 키우면서 철저하게 침공 준비를 했다.
이 기간 동안 훈련된 첩자들을 파견하고 적극적으로 외교를 해 나가면서 미래의 적들을 혼란시키거나 경계심을 늦추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침공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그렇지만 페르시아 원정이 채 마무리되지 못한 1385년에 티무르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상대는 그의
후원을 통해서 킵차크 칸국 전체의 칸이 되었던 토크타미시였다. 그는 티무르가 차가타이 칸국에 합병한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했으며,
곧 양대 칸국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킵차크 칸국을 정벌하는 티무르
두 강대국의 전쟁은 10년간 팽팽하게 계속되다 1395년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테레크 강에서 벌어진 전투각주11) 에서
티무르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 이후 티무르는 토크타미시를 추적하면서 볼가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킵차크 칸국의 주요 도시들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이중에는 황금의 유목민들의 수도였던 사라이 바투(Sarai Batu)각주12) 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시대에 존재했던 전
세계의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 전쟁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의 경제를 지탱하던 교역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어
사마르칸트는 동서 교역로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 티무르의 정복 사업에서는 트란스옥시아나의 번영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킵차크 칸국을 격파한 1395년 이후의 정복 사업은 순수한 정복욕이나 탐욕 외에 다른 이유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티무르의 다음 목표는 인도였다. 티무르는 페르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마친 후에 1398년 전격적으로
인더스 강을 넘어 인도를 침공했다.
당시 인도에는 델리를 중심으로 이슬람 투글루크(Tughlug) 왕조각주13) 가 성립되어 북부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그동안 델리의 술탄들이 힌두교도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슬람이 신앙의 위기를
맞이했다는 명분을 세웠다. 술탄 마무드(Nasir ud Din Mahmud)는 왕위 계승을 위한 내전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직후였기
때문에 티무르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인도는 북방으로부터 잦은 침공을 당했지만 티무르의 공격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숱한 도시들에서 학살, 약탈, 파괴, 강간이 자행되었다. 티무르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한 사람이 최소한 두 명의 적을 죽여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전투 초반에 신속하게 이 할당량을 채우고 나서 노예로 팔기 위해 포로를 사로잡곤 했다.
그 결과 델리에 도착했을 때 티무르의 병사들은 1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 군사행동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그러자 티무르는 병사들에게 포로들 가운데 무슬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참수된 인도인들의 머리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았다.
델리의 요새에서도 1만 명 이상의 인도 병사들이 추가로 학살되었다.
티무르는 1399년 초까지 델리에 머물면서 철저하게 약탈한 다음 무슬림들의 거주 지역을 제외하고는 델리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기술을 가진 장인이나 예술가 들만 예외로 인정되어 트란스옥시아나로 호송되었다. 그는 이 원정을 통해서 얻은 어마어마한
약탈품을 운반하기 위해서 90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했다. 그는 이 약탈품과 포로로 잡아온 예술가와 장인 들을 활용해서
사마르칸트와 트란스옥시아나의 다른 도시들을 장식했다.
이슬람의 수호자이자 이슬람의 적
티무르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항상 이슬람의 정의를 외쳤지만 그가 정복한 지역은 거의 모두 이슬람 세계였다.
인도의 이슬람 정권을 무력화한 후 이제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는 맘루크 왕조와 아나톨리아의 오스만튀르크가 남게 되었다.
티무르는 먼저 맘루크 왕조와의 대결을 선택했다. 그는 1399년 시리아를 침공해서 알레포를 점령했다.
이 불운한 도시의 주민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었지만 학살과 약탈이라는 운명을 피해 가지 못했다. 여기에는 티무르의
독실한 신앙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슬람 신앙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티무르는 이곳에서 정통 수니파 이슬람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티무르는 시아파였다. 논쟁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여러 날 계속되는 동안 티무르의 병사들은 이 도시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티무르의 병사들은 막강했다. 그는 1400년에 맘루크 왕조가 카이로에서 파견한 지원군을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방문한 도시의 대표단을 맞이해 그는 묵주를 돌리면서 온화하게 경건한 신앙심과 관용의 미덕을 강조했다.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기꺼이 성문을 열어 그를 맞이했지만 그는 학살과 약탈로 보상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사람들의 머리로 쌓은 2개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다. 여기에서도 소수의 기술자들만 사마르칸트로
이주하는 행운 아닌 행운을 누렸다. 이 행위로 티무르는 이슬람 세계에서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 Ⅰ)와 티무르 사이에 서로를 심하게 모욕하는 서신들이 오갔다. 바예지드는 '벼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유능한 군주였다.
그는 당시 유럽 최강국의 하나였던 헝가리를 격파하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으며 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십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슬람 세계의 총아였다.
티무르의 이집트 정복
바예지드가 무슬림 형제들을 살육한 파렴치한이라며 티무르를 비난하자 티무르는 아나톨리아의 통치권은 오스만튀르크가
아닌 셀주크튀르크의 술탄이 가지는 것이 정당하다고 응수했다.
티무르는 먼저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여기에서는 약 6만 명의 포로를 잡아 모두 노예로 팔았다.각주14)
이 정도가 티무르가 실질적으로 비이슬람권에서 거둔 유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401년에는 바그다드를 공격했다.
여기에서 약 2만 명의 무슬림이 티무르의 군대에 학살되었다.
그렇게 되자 티무르와 바예지드의 일전이 불가피해졌다. 1402년 6월 20일 양측에서 각기 2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해
최후의 승부가 펼쳐졌다.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여러 날 치열하게 계속되었으며 양측에
모두 여러 차례의 고비가 있었으나 최종 승자는 티무르였다.
바예지드는 전투 중에 포로로 잡혔으며 몇 달 후 사마르칸트에서 사망했다.각주15) 티무르가 정복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 아나톨리아 곳곳에서도 난폭한 약탈 행위가 여러 달에 걸쳐 계속되었다.
1402년 아나톨리아 정복이 마무리되자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제외한 이슬람 세계 거의 전체가 티무르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정복욕은 이 정도로 만족되지 않았다. 그는 이교도 왕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인 중국을
정복하고 중국인들을 모두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중국에서는 몽골 인들이 세운 원(元) 왕조를 몰아낸 명(明) 태조 주원장이 죽고 그의 아들 영락제(永樂帝)각주16) 가
제3대 황제로 막 즉위한 상황이었다. 티무르는 몽골 초원으로 후퇴한 원나라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차가타이
칸국은 여러 해 동안 국경 부근에서 소규모의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1404년 티무르는 대군을 소집해서 중국을 향해 진격했다. 영락제 역시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세계대전 급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순간이었지만 이 흥미진진한 역사적 대결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405년 2월 티무르가 실크로드에
위치한 도시 오트라르각주17) 에서 열병에 걸려 향년 69세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티무르의 삶은 우리에게 '통치자의 미덕이 적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관대하고
현명하며 검소한 지도자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나라에 국한된 것이었다. 난폭한 정복자로서의 티무르, 그 원천적인
문제점은 그의 유별난 애국심이었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역사에서 최고의 영웅이지만 동시에 주변국의 역사에서는 최악의 악당이기도 하다. 그는 헌신적인
지도자였으나 오직 자신의 조국에만 헌신했다. 스스로 명예를 탐한 적도 없다. 비록 그의 후계자들은 찬탈자가 되었지만,
그 자신은 칸이나 술탄의 지위를 언급한 적조차 없다. 스스로를 낮추고 언제까지나 대신인 '아미르'에 머물고자 했다.
티무르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학자들과 종교, 철학, 역사를 논했으며 전장에서도 그를
수행하는 시인들이 낭송하는 페르시아 문학에 심취하곤 했다. 그가 이러한 지적 유희를 즐기는 동안 그의 병사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곤 했다. 그로 인해 무려 1,70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의 시대에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어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서고 문학과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시대는 그가 세계 도처에서 난폭한 방식으로 약탈해 온 재물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통치란 실현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속한 세계의 축복은 곧잘 다른 세계의 저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죽은 이후에도 초자연적인 저주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를 병합했던 소비에트 연방
소속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1942년 티무르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관을 열기로 결정했다. 이중으로 밀봉된 그의 바깥쪽
관 앞면에는 아랍 어로 쓰인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새겨져 있다.
내가 일어나게 되면 전 세계가 공포에 떨게 되리라.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소비에트의 학자들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관의 첫 번째 봉인을 열었다.
그러자 두 번째 경고문이 안쪽 관의 겉면에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 내 무덤을 여는 자는 나보다 더욱 무서운 침략자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경고까지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키가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건장한 튀르크 인의 유골을 확인했다.
이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 결과적으로 티무르가 평생 살해한 수준의 소비에트 연방 인민들이 불과 3년 만에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 발생했다. 나치 독일의 전격적인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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