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위한 글

수명(壽命)에 대한 소고(小考) .... 23.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흥미진진한 사건이어야 한다.

뿅망치 2020. 9. 20. 08:52

언제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영혼이 존재하고 죽음 이후에 가는 또 다른 영혼이 머무

는 세계가 있다는 전제(前提)가 있어야 한다.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가정(假定) 아래에서는 이런 모든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글들은 영혼이 존재하고 영계(영혼이 머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썼

던 글이다.

죽어서 영계에서 살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계가 어떤 곳이란 것을 알려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죽었다 살아난 예수도 그곳에 가서 살아보지는 못했고 수많은 영통인들이나 잠깐 죽어서 영계를 보

고 온 사람들은 잠깐 동안 보고만 오거나 느끼고 온 것 뿐이다.

 

흔히들 예수가 죽어서 3일 만에 부활했으니 영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생각하겠지만 실지

로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평안한 곳에서 그냥 먹고 마시고 춤추고, 놀고....

이 세상이 평안한 곳이 아닌 생명의 위협을 받는 불안한 곳이며, 먹고 사는 것이 급급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굶어 죽는 일도 비일비재한 곳이다가 보니, 소망이 평안하고 안락한 곳에서 배불리 먹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소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이야기들은 평안하고 즐겁고 먹고 마시는 그런 곳이라고 소개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사실 아는 것이 없다. 종교마다 지역마다 그곳에 대한 설명이 다르고 시

대에 따라 그곳에 대한 설명이 달라지는 것을 보아 지금까지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아는 것이 없

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고 죽으면 본인이 싫든 좋든 그곳을 향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곳

이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려웠고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불로초

나 신선 복제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결합되어 있을 때를 사람이라고 한다.

영혼(정신까지)이 떠난 사람은 시체라고 부르고 육신을 떠난 영혼을 귀신(鬼神)이라고 부른다. 온전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둘이 반드시 결합이 되어 있어야만 온전한 인간이 된다.

 

죽음이라는 과정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과정으로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결국은 신체의

기능은 정지하는것이다.신체의 기능이 정지하게 되면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나오게 되는데 그

과정이 죽음이라는 과정이다.

 

육신을 빠져나온 영혼은 지상에 잠깐 머물다가 영혼이 머무는 세계로 가게 되는데 영혼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자신이육신을 쓰고 살았던 세상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한 것이지만 자신이 살아갈

영혼의 세계에서 보면 탄생인 셈이다.

 

태아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뱃속의 태(胎) 속에 있다가 그 태를 찢고 산도(産道)의 좁은 골짜기

를 통해서 태어나는 과정은 한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탄생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파괴가 되면서 그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죽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태어난 새로운 세상은 자신을 사랑해줄 부모가 기다리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탄생이라는 것은 반드시 한 세상의 파괴 곧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 세상의 관점에서만 보았지만 또 다른 세상, 곧 저 세상의 관점에서 보

면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닌 기쁜 것이 되는 것이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갑게 맞이해주는 부모가 있는 것처럼 저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

와 같은 영혼을 맞이해주는 그 어떤 존재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기다려지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기다려 지겠는

가? 심지어는 언제 자신이 죽게 될 것인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오래 살라고 아무리 간청을 한다고 해도 오래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보다는 그 세상이 더 살기가 편할 것인데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육신을 붙들고 고생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승(高僧)들이나 도인(道人), 그리고 고결한 성직자(聖職者) 등은 자신이 죽을 날도 알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곳이 어떤 곳인 줄을 알기도 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이 어

떤 것인지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한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바에야 그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맞이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지의 세계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세상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때가 되어 저절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태아가 의식이 있어서 바깥의 세상에 아무리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알 수가 없고, 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냥 탯줄을 통해서 들어오는 영양분만 잘 섭취하고 정상적으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문제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잘 살기만 하면 저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걱

정할 필요가 없다.

태아가 태어나서 저절로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태아가 뱃속에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이 세상 살기가 어려운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영혼의 장애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저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영혼의 장애라고 한다면 심한 이기주의(利己主義)라든가 자비가 없이 잔인하다든가 하는 남에게 피

해를 주는 그런 마음가짐 정도일 것이다.

 

흔히들 종교에서 죄가 없는 사람이 천국을 간다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죄는 죄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며 죄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

이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살면서호적에 빨간 줄 올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백두산의 천지 연못은 내가 있다는 것을 믿고 안 믿고의 영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존재나

영계의 존재도 내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닌 영역의 문제로 믿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그리고 그 세상이 있다면 내가 죽어서 가는 세상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서 사는 것이 유익하다.

더 선량하게 살 수가 있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으니....

 

죽음이라는 과정은 슬픈 것이 아닌 세로운 세상으로 출발하기 위한 과정으로 흥미진진한 과정이라

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