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스페인 모로코

맘마미아밴드와 함께한 두바이, 모로코, 스페인 여행(40)....바르셀로나 가는 길에 있는 페니스콜라(거시기 끄트머리)

뿅망치 2024. 6. 22. 15:19

어제 카스테욘 데 라 플라나까지 갔다가 30분 정도를 발렌시아가 쪽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9시가 넘어서 호텔에 들어갔는데 그

라나다에서 오는 도중에 호텔이 변경되어서 운전기사가 그 호텔을 잘 못 찾는 바람에 우리는 한 시간을 더 차를 타게 된 셈이다.

내일도 일정이 바르셀로나에 들러서 중요한 관광지를 구경하고 마드리드 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바쁘게 서둘러야 한다며 7시

반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을이 소박하며 아담하게 생겼다. 지도를 보니 발랜시아와 카스테욘데라 플라나의 바로 중

간이다. 한 시간이나 길에서 소비하다니...

오늘의 중요 일정은 바르셀로나의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몬주익 언덕과 구엘 가족공원, 성가족 성당을보는 것으로 가

는 길에 관광지인 페니스콜라라는 곳을 들러서 간다고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호텔 앞 마을  la Vall d'Uixó이라는 시골 같은 동네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서 아주 조용한 시골 같다....아직 날이 다 밝지 않았다.

Hotel Belcaire...외부에서 보면 호텔 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스페인에 있는 동안 모든 호텔이 이랬었다.

Hermanas Misioneras de Cristo...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지만 지도에는 하숙집으로 나온다.

바로 옆에 있는 Santa Maria dels Desemparats...성모 마리아까지만 알겠고...

이곳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300㎞가 넘고 중간에 페니스콜라를 들러서 가기 때문에 일찍 서둘러서 7시 반에 출발 을 한다.

 

 

가는 도중에 보이는 풍경들은 어제와는 다른 오렌지 밭이다.

가이드는 출발하면서 스페인의 중근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는데 관광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강의지만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라 그런 강의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은가 보다.

스페인이 몇 년 전까지만 했어도 경제가 막장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좀 회복이 되어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높아

졌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의 어느 나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청년실업의 문제가 이곳도 예외는 아닌데 스페인의 축구리그가 청소

년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주범 중의 하나라고 나이든 사람들이 한탄을 한다고 한다.

빈둥거리면서 축구리그에 열광하면서 술에 취하여 사는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어제와는 다르게 오렌지 밭들만 보인다.

오렌지가 익어서 붉은 꽃처럼 보인다.

길가는데 보이는 성채...

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들

육지쪽은 별장처럼 지어진 집들이다.

보이는 바다는 지중해로 해변에는 도시들이 이어져 있다....

빌딩이 없는 시골마을은 어느 마을이나 제일 큰 건물은 종교시설이다.

 

우리가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에 있는 페니스콜라(Peñíscola)는 우리가 잠을 잤던 숙소에서 100㎞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중해에 있

는 관광지로 이곳에서 페니스콜라 국제 코미디 영화제(Festival Internacional de Cine de Comedia de Peñíscola)를 개최하여 많은

배우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곳은 페니스콜라 성(城)(Castillo de Peñíscola)이 있는데 이곳에서 찰톤헤스톤과 소피아로렌이 주연한 엘 시드(El Cid 1961 제

작)란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 성은 바닷가에서 자라머리처럼 이어져 나온 조그만 섬에 만들어진 성으로 성 안에

페니스콜라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러보는 곳이다.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페니스콜라 라는 이름의 의미는 단어 그대로 직역(直譯)을 하면 남자의 거시기 끝이라는 의미

로 Penís는 음경을 cola는 끝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왜 이런 이름이 붙어있는지 수긍이 간다....

페니스콜라...거시기 끄트머리라는 이름이 수긍이 가는 지도이다.

이르타 산맥(Sierra de Irta) 기슭과 해변에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성 쪽에서 보는 페니스콜라

페니스콜라 성채

페니스콜라 성채라는 글..

주차장에 내려서 쳐다보고...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숙소에서 출발한지 1시간 반이 지난 시간으로 9시 가 조금 넘었다. 오늘 일정을 쪼개서 써야 하므로

페니스콜라 해변을 둘러보는 시간은 없고 성안만 구경하고 내려오는 정도이다.

 

성에 올라가서 주변을 내려다보면 모래사장이 이어져 있고 야트막한 이르타 산맥(Sierra de Irta)이 해변 가까이 있어서 휴양지로

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성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내판들을 찾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성안의 골목길을 따라 정신없이 올라가서 주

변을 둘러보면서 경치를 구경하고 카메라에 담고는 곧바로 내려오는데 그날이 일요일로 마을 사람들이 가운을 입고 마리아 상과

예수 상을 앞세우고 골목을 행진을 하고 있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이기 때문에 가톨릭 행사의 하나인 모양이다.

비탈길을 통해서 성을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런 길을 올라가면 오른 쪽에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는데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돈을 내여 한다고

 한다.

언제 만들어진 바닥인지 모르지만 돌이 다 닳았다.

성채쪽에서 보는 페니스콜라...

골목의 집들은 거의 다 카페나 기념품 가게다.

올라가는데 보이는 골목....

 

이런 절벽과 바다도 보이고...지중해 바다이다.

전망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전망대 아래서 보는 바다.

저 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돈을 받아서 안 갔다....저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사방을 다 볼 수가 있어서...

등대도 있고...

골목골목에는 식당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성에서 보는 육지쪽

잔잔한 바다와 모래사장이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보다  더 크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사장과 건물들....어제 저녁에 이곳에서 묵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마을 주민들이 다 참여를 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성을 한바퀴 도는 듯...골목을 지나가고

이곳도 성이 로마시대부터 있덨던 성인 듯...

이런 저런 모습들...

성 출입문 중의 하나??

골목들의 모습들

아마도 대부분 숙소로 이용되는 듯하다.

행진하는 사람들을 골복에서 또 만났다.

성모 마리아상이 앞에 가고..

행사의 마지막인 듯

등에다  팻말?을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예수의 상도 등장하고...성모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가는 듯...

행사 일행을 지나쳐 내려가는 골목...

아직 관광객들이 많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이제 가게를 열기 시작한다.

이곳에도 사람이 사는 듯..

성 밖으로 나가고 ...들어왔던 문이다.

섬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쳐져 있다.

위에 보이는 곳이 전망대이다.

주차장 옆에 있는 닻 그림이 있는 레스토랑

본격적인 촬영의 시간이다.

성을 배경으로 인증샷

 

성은 아주 좁아서 당초에 성이 건축될 때에는 요새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주거지가 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 안에

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음식점, 기념품 가게, 숙박업소 등 등....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한 구경을 하고 바닷가에서 이곳에 왔다가는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바

르셀로나로 향한다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본토인들과...

그들의 차를 소품 삼아 멋을 부려보고...

인생의 아름다운 한 때로 기억되기를...

바르셀로나로 출발을 한다.

 

https://youtu.be/JwZ7DJjLaos?si=MvoXpPV-L6VMr91B...페니스콜라 유튜브

 

엘 시드라는 영화를 보신 분 중에서 시간이 있는 분은 아래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길...

 

1961년도의 엘 시드.영화 포스터......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한 영화로 지금도 가끔 케이블에서 볼

수 있다.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 1043~1099.7.10)이나 엘 시드는 그를 존경하는 말로

 아랍어로 '주군' 또는 '주인'이라는 뜻인 시드(Cid)'가 어원이라고 한다

 

생애

로드리고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에고 라이네스는 카스티야의 소귀족(infanzones)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의 사회적

배경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후세의 전승과는 달리 그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외가는 넓은 땅을 가진 귀족 집안이었으며 그는 페르난도 1세의 궁정에서 나중에 카스티야 왕 산초 2세로 즉

위한 왕자와 함께 자랐다. 산초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1065) 후 22세의 엘 시드를 국왕군 지휘관인 국왕 기수(a

rmiger regis)로 임명했다.

 

엘 시드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지위에 오른 것은 이때부터 이미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음을

나타낸다. 1067년 그는 산초를 수행하며 무어인들의 사라고사 왕국 원정을 떠났고, 사라고사 왕국과의 협상을 주

도해 이 왕국을 카스티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페르난도 1세는 죽을 때 여러 자식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면서 둘째 아들 알폰소 6세에게 레온을 물려 주었다. 산

초는 레온을 합병하기 위해 1067년 동생 알폰소 6세와 전쟁을 시작했고 후세의 전설은 엘 시드가 마지못해 산초

의 공격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일을 망설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산초의 레온 원정은 성공적이

었고 알폰소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 원정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엘 시드는 산초가 후사 없이 1072년 사모라를 공격하다 전사하고 알폰소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엘 시드는 국왕 기수의 지위를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엘 시드는 이 사

람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음)이라는 유력자에게 빼앗겼고 궁정에서 누렸던 영향력도 자연히 줄어들었지만, 계속 궁

정에 남아 있을 수는 있었다.

 

1074년 7월 그는 아마도 알폰소의 권유로, 왕의 조카딸이자 오비에도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

로 그는 레온의 옛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히메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두 사람은 아들 하

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도 알모라비데인들과 싸우다

가 콘수에그라 전투(1097)에서 전사했다.

 

히메나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엘 시드의 궁정 내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레온 군주인 알폰소의 통치에 불만

을 가진 카스티야 사람들은 엘 시드를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대지주 귀족들이 알폰소 6세

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엘 시드를 영웅으로 묘사한 전기들은 그를 뻔뻔한 귀족들과 중상 모략에 눈먼 알폰소의 무고한 희생물로 묘사했지

만, 엘 시드의 유력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아마 그의 몰락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기민하고 빈틈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궁정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산초의 죽음으로 영향력을 잃은 데

 대한 원한 때문에 잠시 자제력을 잃었던 것 같다.

 

1079년 세비야를 지배하던 무어인 왕에게 사절로 가 있던 그는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오르도녜스는 그라나다 왕의 세비야 침략을 지원하고 있었다. 엘 시드는 세비야 근처의 카브라에서 훨씬 우세한

그라나다군을 격파하고 가르시아 오르도녜스를 사로잡았다.

 

이 승리가 그에게는 몰락의 첫걸음이었는데 1081년 그가 알폰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무어인의 왕국 톨레도를 무

단으로 공격하자 알폰소 왕은 엘 시드를 카스티야에서 추방했다. 그 후 여러 차례 화해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성과

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081년 이래 엘 시드는 두번 다시 장기간 알폰소의 영토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이슬람 교도에 대한 봉사[편집]

 

추방당한 엘 시드는 이제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 사라고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가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조와

처음 접촉한 것은 1065년이었다.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사라고사의 왕 알 무타민은 허약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기독교 전사 엘 시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엘 시드는 알 무타민과 후계자인 알 무스타인 2세를 거의 10년 동안 충성스럽게 받들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스페

인 아랍 국가들의 복잡한 정치와 이슬람 율법 및 관습을 터득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유지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그는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082년 엘 시드는 알 무타민을 위해 레리다의 무어인 왕과 그의 동맹군인 기독교 군대를 격파했고 이 기독교 군대

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도 끼어 있었다. 1084년에는 아라곤 왕 산초 라미레스가 이끄는 대규모 기독교 군대를 무찔

렀으며 이런 승리에 고마움을 느낀 무어인 군주들은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1086년 북아프리카의 무라비트 왕조가 대규모로 스페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사그라하스에서 참패를

 당한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에 대한 적개심을 억누르고, 기독교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군인 엘 시드를 망명지로

부터 불러들였다.

 

엘 시드가 1087년 7월에 알폰소의 궁정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는 다시 사라고사로 돌

아갔고, 그 후 스페인 내 기독교 왕국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투가 여러 전략 요충지에서 치열

하게 벌어졌지만 엘 시드는 어느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엘 시드는 이제 부유한 무어 왕국인 발렌시아를 차지

하기 위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정치적 책략에 착수했다.

 

발렌시아 정복[편집]

 

그의 첫 번째 조치는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1090년 5월 베렝게르

 라몬 2세를 테루엘 근처의 테바르에서 참패시킴으로써 이 목적은 이루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엘 시드는 발렌시아와, 이제 자기에게 공물을 바치게 된 발렌시아 통치자 알 카디르에 대한 지배

력을 조금씩 강화했다. 1092년 10월 카디(최고 행정관)인 이븐 야하프가 무라비트 왕조의 정치적 지원 아래 반란

을 일으켜 알 카디르 왕을 살해했을 때, 엘 시드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엘 시드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물샐틈없이 포위해 몇 달에 걸친 공격을 퍼부었고 1093년 12월 포위를 돌파하려

는 무라비트측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1094년 5월 이븐 야하프는 항복했고 엘 시드는 마침내 정복

자로서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지배권을 쉽게 빼앗기 위해 우선 이븐 야하프와 협정을 맺었고 이븐 야하프는 반란과 국왕 시해가 용서받았

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협정의 목적이 달성되자 엘 시드는 이븐 야하프를 체포해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엘 시

드는 이제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이슬람 교도들의 최고 행정관으로 행세하면서 발렌시아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

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알폰소 6세를 대신해서 발렌시아를 차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발렌시아를

 다스리는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은 1096년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프랑스인 주교 제롬이 새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상당수의 기독교도 이주자들이 발렌시아로 들어왔다. 엘 시드는 맏

딸 크리스티나를 아라곤 왕국의 왕자이며 몬손의 영주인 라미로와 결혼시키고, 둘째 딸 마리아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결혼시켜 군주로서의 지위를 과시했다.

 

죽음[편집]

 

발렌시아에서 엘 시드는 아내와 함께 5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으나 1099년 무라비트 왕조가 결국 발렌시아로 쳐들

어왔고 6월 10일 결국 전투 도중 심장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발렌시아군은 사기를 잃고 발렌시아는 함락당했으며 이후 1102년 2월 5일 탈환된 이후에도 125년

 이상 기독교 도시가 되지는 않았다. 1101년, 그의 아내 히메나 디아스(Jimena Diaz)는 수행원들과 함께 엘 시드

의 시신을 운구하여 부르고스로 피난했다. 원래 카스티야의 산 페드로 데 카르데냐 수도원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

은 현재 부르고스 대성당 가운데에 묻혀 있다.

 

후손[편집]

 

나바라의 왕 가르시아 라미레즈는 엘시드의 외손이다. 가르시아 라미레즈의 외손은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8세이

며 가르시아 라미레즈의 장남 산초 6세의 외손 테오볼드가 나바라의 왕이 되며 그의 후손은 나바라와 프랑스의 왕

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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