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밴드와 UAE.모로코, 스페인

대한민국 최고(?)의 주부밴드인 맘마미아밴드와 함께한 두바이, 모로코, 스페인 여행(25) 스페인(4)...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전(3)알카사바

뿅망치 2018. 7. 24. 22:21

카를5세궁을 마당에서 한 번 둘러보고는 알 카사바로 향한다.

알카사바(Alcazaba)는 요새(要塞)를 뜻하는데 한 쪽은 한 쪽은 나스르 궁전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3면은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성은 나스르 왕조를 연 모하메드 1세가 기존의 로마시대부터 있던 성채를 현재의 규모로 확장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성채는 알람브라 궁전이 세워지기 전인 9세기경부터 13세기에 걸쳐 완성된 알람브라 궁전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셈이다.  

 

알카사바 앞은 광장으로 박태기 같은 나무들이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나무가 오래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왕 아브 압달라가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그라나다를 양도하는 현장을 보았을 정도로 오래 되 보이지는 않는다.


좌측에 알카사바가 보이는데 알람브라궁전이 언덕위에 있어서 외부에서 침공이 어렵다...공중에서 보아도 카를5세궁은 어울리지 않는다.

알카스바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는 정원에서 본 알바이신...나무 밑으로 니콜라스 전망대가 보인다.

알카스바로 들어가는 문

요즈음 말로 하면 군인들의 연병장 쯤 되는  곳으로 광장이다.

마당에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박태기 나무  같다.


알카사바 성채는 붉은 벽돌과 돌을 이용하여 건축되었는데 13세기에 건축되었으니 8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전쟁을 하지 않고 나라를 넘겨 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리라,.....

 

아 요새는 24개의 망루가 있었고 병사들의 숙소, 창고, 목욕탕, 식당 등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으며 5천여명이 상주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성채의 외곽은 남아 있지만 병사들이 생활하던 건물들은 터만 남아 있다. 


알카스바 성채로 들어가는 곳...티켓 검사를 하고

알카사바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벨라의 탑 이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통로...너무 견고하여 대포가 없는 시절이라면 난공불락의 성이 아닐 수  없다. 

붉은 벽돌과 돌들로 쌓아 올린 성벽

벨라의 탑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본 알바이신 지구...전망대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깃발이 있는 곳에 보이는 종탑이 벨라의 탑이다....네개의 깃발은 유럽연합기, 안달루시아기, 스페인국기, 그라나다시기로...그라나다라는 단어가 석류를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시기 안에는 석류그림이 들어가 있다. 

병사들이 거주하던 건물이 있던 곳들

이런  건물들을 지나거 건망대 쪽으로 올라간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

아치형 속에 있는 돌들은 투석용으로 사용한 돌인 듯......

방어하기 더 쉽도록 2중성벽으로 되어 있다.



요새 중앙에 잇는 가장 높은 '벨라의 탑'에 오르면 알람브라 궁전과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시내와 남쪽의 시에라네바다 산맥까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알바이신 지구에서는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이곳 알람브라 궁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옥상 하나 가득 보인다.

알바이신은 다로 강을 끼고 알람브라 궁전 북쪽 언덕의 이슬람교도들이 만든 성채 도시로, 그라나다에서 무어인의 자취를 가장 잘 느껴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왕궁도 있었던 곳이었으나 그라나다가 점령당하고 무어인들이 아프리카로 물러가면서 도시가 쇠락했으나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복구가 이뤄지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고싱 되었다고 한다.

 

알바이신은 그라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로 알람브라 궁전이 생기기 이전에는 이 언덕 위에 그라나다 왕의 궁전이 있었던 곳이고 무어인들이 살던 그라나다의 옛 건물이 아직도 상당수 남아 있어서 안달루시아의 전통 건축과 무어인 특유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알바이신의 정상 부근에 위치한 산 니콜라스 성당(Iglesia de San Nicolas)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알람브라 궁전과 시에라네바다 산의 전경이 가장 좋다고 하며 밤에 플라멩고를 감상하고 나서 이곳에서 야경도 보는 곳이라고 한다.

이번 일행 중에는 이런 내용들을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야경신청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알바이신 지역 구경이나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알람브라 야경도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건너 보이는 알바이신 지구...이곳에 왕궁이 지어지기 전에는 왕궁이 있던  곳으로 이슬람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이 어떤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인증샷에 더 관심이

보이는 성의 모습들

그라나다 시내...가운데 그라나다 대성당이 보인다.

남쪽으로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시내들도 보이고

북쪽으로 보이는 알바이신..저 거리를 한 번 가 보아야 한다는데...

벨라 탑이 있는 알카사바 전당대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들...



알카사바 구경을 마치고 알람브라 매표소로 나와서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러 갔는데 식당에 갔더니 한국 단체 관광객들이 보인다.


알카사바를 끝으로 알람브라궁전의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는 길애 보이는 모습들

나무는 아직 잎이 없지만...땅에는 붓꽃이 피어 있다....나오는 길

이런 카페도 보이고...

귀엽게 생긴 엠블란스??

들어가는 입구...알람브라가 스페인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데... 스페인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니 붐빌 수밖에 없다.

주변에는 공원이 있어서 공원에 봄이 오는 중이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

알람브라를 오는 한국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인가보다...

스페인의 대표음식중의 하나인 돼지고기 뒷다리로  만든 하몽....요즘은 중국인들이 하몽 맛을 알아서 수입해가는 바람에 하몽 값이 올랐다고 한다...하몽 종에서 최상품은 도토리를 먹고 큰 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하몽이라고...비위가 약한 사람은 처음 먹기가 곤란하다.

 

현지식으로....빵과 스튜와 야채와 마카로니 그리고 과일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의 식당주변

가이드가 앞장 서서 주차한 곳으로 간다.

멀리 시에라네바다 사맥의 눈산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알카사바의 전망대에서 본

 

그라나다와 알바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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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브 압달라는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결혼하면서 두 왕국이 합동하여 그라나다를 공격하자 수십만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항복하면서 그라나다왕국의 종교와 재산권 그리고 상권을 유지시켜달라는 조건을 제시했다.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전쟁 없이 왕국을 양도한 아들에게 노해서 아들에게 “네가 남자답게 이 왕국을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어라”는 말을 남기고 궁전을 떠났다고 한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이사벨라는 약속들을 지키지 않고 그라나다를 점령한 지 4개월이 흐른 뒤 ‘알람브라 칙령’을 내리게 되는데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지 1492년이 되는 해의 3월 31일, 그라나다에서 이 교서를 반포한다. 유대인들은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 거주 지역, 현지 출생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라는 칙령이다.

 

당시 그라나다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숫자는 최소 1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이곳에 이처럼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던 이유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하마드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우대하라’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사소한 차별 규정, 예를 들어 말 대신 노새를 타고, 노란색 터번이나 띠를 두르고 종교 활동을 요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만 지키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유대인의 추방은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가 자신들은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관습과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끼쳤다고 생각하여 칙령을 내렸다는 이 이유는 핑계일 뿐, 기도교인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을 미워해서이다.

 

조상 대대로 수백 년을 다져온 삶의 터전을 불과 4개월 안에 정리하고 떠나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로 날벼락을 맞은 유대인들은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되는데 대부분이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이들 중 6만 명이 포르투갈로 가게 되었는데 포르투갈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받고 그들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르투갈에 정착했던 그들도 역시 에스파냐와 똑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시키자 다시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사적으로 알람브라 칙령은 에스파냐의 몰락과 네덜란드의 융성, 그리고 대영제국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에게도 많은 제약을 가하자 결국 많은 이슬람교도들도 북아프리카로 대량 이민을 가게 되므로 그라나다는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몰락했고 다시 회복하는데 20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정복자들은 그라나다를 점령하자마자 이슬람의 잔재를 철저하게 파괴하기 시작했는데 그라나다를 방문한 페르디난도는 알람브라궁전을 보고 아름다움에 놀라 파괴를 중지시켰으니 이미 3분의 2가 파괴된 후였다고 한다.



알카사바 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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