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위한 글

수명(壽命)에 대한 소고(小考) ....9. 죽음은 본래 슬퍼할 일이 아니다.

뿅망치 2020. 8. 31. 10:05

9. 죽음은 슬퍼해야 할 일인가?.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고 그것에 대해서 괴로워한다. 특히 자기와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

록 슬픔과 괴로움은 더 크다. 그러나 그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를 곰곰이 분석해 보면 감정적으

로는 슬프고 괴로운데 논리적으로 왜 슬픈지를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죽어서 가는 세상이 있다면 거기 가서 만나면 될 것이고 죽어서 가는 세상이 없다면 슬퍼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죽음이 슬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이라는 시공의 제한을 받는 입장에서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그런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육신의 틀에 갇혀있던 영인체(영혼)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

 

대부분의 곤충들은 알, 애벌레, 성충이라는 전혀 모습이 다른 3 단계의 변태의 과정을 거친다.

잠자리는 알에서 깨어나 물속에서 몇 년을 살다가 우화(羽化)의 과정을 거쳐서 물속의 생활과는 전

혀 다른 창공을 비행하는 잠자리로서 변화를 하고 매미도 마찬가지이다.

잠자리의 애벌레가 살던 물속이나 매미의 유충인 굼벵이가 살던 땅속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아

간다.

 

인간의 죽음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곤충이 우화(羽化)하는 것처럼의 변화의 과정이라고 생

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곤충이 우화를 하지 못한다면 계속 땅 속에서나 물속에서 애벌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에게 육신의 죽음이라는 과정이 없다면 노쇠해진 육신을 이끌고 한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

을 것이고 그 것은 축복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에게 찾아오는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신의 섭리일 뿐이다.

 

종교계에서 인간의 죽음을 죄를 지은 벌로서 인간에게 죽음이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하지만 이러

한 원칙을 알지 못하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틀 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곤충이 우화하는 것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내용이어야 한다. 본래의 죽음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일생을 살펴 볼 때 잉태되어 어머니 뱃속에서 10 개월을 성숙하는 과정이 있다.

이 복중에서 태아는 이 세상을 살아갈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하여서 태어나게 된다.

대부분은 잉태부터 부모의 친척의 축복과 관심 속에서 10 개월을 있다가 새로운 세계로 탄생될 때

도 축복가운데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은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세계에서는 부모와 친척이 태어남을 기다렸다가 축

복으로 맞아주는 것이 인간의 탄생의 모습이다.

 

그렇게 육신과 더불어 육신을 집으로 하여 태어난 영혼은 육신과 더불어 성장을 하고 잘 익은 열매

가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지듯이, 영혼과 육신과 분리되어 흙의 요소로 이루어진 육신은 다시 흙으로

환원되고 영은 영의 세계로 가게 된다.

 

만약 죽음을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영혼이 머무는 곳이 있다고 한다면 먼저

가있던 부모와 형제들 친지들이 새로운 세계로의 탄생을 축복 속에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지 않겠

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가족이 기뻐하고 축복해주는 것처럼 그 쪽도 여기와 같

은 모습으로 기뻐하고 축복해 줄 것이 아닌가?

 

논리적으로 전혀 가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죽음을 슬퍼하고 애통해한다.

 

그것은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보는 관점 때문이다.

 

죽음이 그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다시는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때문

에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

만약 그 관점을 그 이후까지 연장시킨다면 사랑하는 부모나 부부 자녀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될 것

이므로 그렇게 애통하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세상에 누구도 인생의 근본목적을 완전히 알고 간 사람은 없다.

 

여기서 인생의 목적은 육신 속에 있는 영혼의 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완성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완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사

이에서 사랑의 완성을 통하여 또는 우주만물과(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의 사랑을 통하여

완성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서 누구나 사랑을 완성하게 되면 그 영혼은 완성되고 완성된 영혼은 마치 부처

님이나 예수님의 그림에 그려진 후광처럼 그런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열심히 부르면서 그 노래의 뜻이 얼마나 심오한 뜻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 뜻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聖人)은 특별한 사람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도 있고 또 성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영혼의 완성은 고사하고 영혼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죽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본심은 죽

음 그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못하고 떠나는 영혼을 슬퍼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여행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고 그 여행길을 떠난다면 그 여행길이 고

달플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과일은 다시 나무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나무에서 익지 못하면 영원히 익을 기

회가 없다.

그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완성을 하지 못한 상태로 육신이 분리된다면 그 영혼은 다시는 완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익은 열매가 그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사랑을 완성한 사람의 죽음은

슬퍼할 필요가 없고 본인도 슬퍼하지 않는다.

 

 

다음에 계속

 

2002.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