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위한 글

내장사 대웅전 화재사건을 보면서.....By the rivers of Babylon(2)

뿅망치 2021. 3. 11. 23:01

나이가 든 사람들은 미국의 흑인 가수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고 따라서 불러도 보

았을 것이다.

이 노래는 1978년도에 발매되어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한 곡으로 댄스곡으로 디스코를 유행시킨 곡이기도 하다. 

youtu.be/EtlYbfv-9Ro

이 노래의 가사는 우리가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노라 라고 시작하는 구약 성서 시편 137편의 내용을 노래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노래의 곡이 그런 슬픈 노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편 137 편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異邦)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찌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毁破)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이 시편의 내용의 배경은 기원전 6세기에 유다왕국이 신바빌로니아의 느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에게 멸망당하고 유대

왕 히스기야왕과 유대인들이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이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신세 한탄과 더불어 복

수심을 노래한 것이다.

 

유대민족은 스스로 선민(選民)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민족이다.

지금도 그 자부심은 가지고 있겠지만....

 

그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나라가 망하고 노예로 잡혀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할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은 전지전능한 야훼(하나님) 선민이 아닌가?

야훼의 선민이 어찌 이교도의 노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야훼는 전지전능한 신(神)으로 이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모든 신 중(中)의 신인데 다른 신을 믿는 민족에게 노예로 끌러 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에훼와 자신들의 관계 그리고 야훼의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럼에도불구하고 야훼가 우리를 단련하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구나 하고 이럴수록 더 열심히 섬기리라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민족이 세상 가운데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

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솔직히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 앞에서 종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부르던 노

래를 부르라고 하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부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결국 자신들에게 노

래를 부르라고 시킨 자들의 자손들을 헤치는 자에게 축복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자신들이 믿는 신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힘도 세지 않고 자신들을 돌볼 힘도 없거나 돌 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며 사실 그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성서를 정비하고 새로운 신학 이론도 받아들이게 되는데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들이다.

포로 이전에는 천사장, 사탄, 육체 부활, 심판, 낙원, 지옥, 세상 종말 등의 개념이 없었지만 포로 생활 이후에 이런 개념이 등장

하게 되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들이라고 한다.

지금 기독교의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이 이때 받아들여진 내용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유대민족이 그 이후에 나라가 망해서 민족이 흩어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는데 로마에 저항하다가 나라가 망해버린 AD70년이

다.

만약 유대인들이 끝까지 저항을 하지 않고 적당하게 타협을 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나, 선민이라는 자만심 때문에

끝까지 저항을 하게 되자 아예 이스라엘에 살지 못하도록 흩어버리고 이민족을 살게 해 버린 것이다.

 

나라가 없이 흩어지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야훼가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이런 수난을 당하게 한다고 했을까?

아니면 무능한 야훼를 원망을 했을까?

 

유대민족이 야훼가 자신만의 신이라는 생각에게 세상 모든 사람의 신이라는 생각을 변화 시키게 되는 계기들이 이런 사건이었

다고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언급을 한다.

오 교수가 예로 든 내용들은 시편 137편과 2차 대전 때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교수대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년을

보았던 엘리 위젤이라는 소년이 나중에 그때를 기억해서 당시를 기억해서 쓴 (Night) 이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아래는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처럼 엄청난 역사적 정황 속에서 유대인은 지가들만 사랑하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옛 생각이 얼마

나 허망한 것이었던가 하는 시실을 발견하고 지기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종래까지 자기들 민족만을 위하여 역사하신다는 이른바 "부족신의 신관"을 버리고 하나님은 온 세상을 위한 신, 온 우주를 다

스리는 보편신의 신관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출애급 등 이스라엘 백성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애급인이나 가나안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도 불사하는 한 민족이나,

한 집단의 신이라는 믿음이 새로운 역사의 정황에서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고 제 2 이사야나 에레미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처럼

세상 만민을 위해 보편적인 사랑과 공의를 배푸시는 신, 그들을 위한 슬픔과 애통함,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신 신이라는 생각이

등장하게 된다.

 

오늘 우리도 새로 등장한 자연과학, 철학 심리학 인류학 정치학 문헌학 예술 정보 대중매체 등 다시 완전히 새로운 정황과 환

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포로들이다.

옛날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이 새로운 정황 속에서 참담한 심정을 가눌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껏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것' 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종래까지의 세계관, 신관, 가치관, 성경관, 예수관, 종말관, 등등의 그 문자적 표피적 의미에서는 완전히 힘을 쓰지 못하는 황당

함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옛날 순진하고 단순하게 살 수 있었던 때를 기억하며 "울었노라"의 심정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우리는 언제까지 예전 시대에 받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신주 모시듯 모시고, 그런 것에 대한 옛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새 노래를 지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

.

.

중략

********************

 .

그 후 2천 몇 백 년이 지나 독일 나치 정권에 희생된 현대 유대인도 그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현대 유대인은 그들의 비참한 대량 학살(영어로 홀로코스트 히브리어로Shoa) 경험을 통해 종래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초자

연적인 유일신관이 여지없이 흔들리는 참담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이가 바로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생 유대계 미국인 엘리 위젤이다.

 

그는 'Night'라는 그의 유명한 자전적 소설에서 그 참담함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수용소에서의 첫날 밤, 일곱 번씩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씩 일곱 번 봉인된 채 나의 삶을 기나긴 악몽으로 바꾸어 놓

은 그 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인육이 타서 올라오는 그 연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의 몸이 그 무심한 창고 아래서 연기 다발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 그 어린아이들의 작은 얼굴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믿음을 영원히 소멸해 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에게서 살아갈 의욕을 영원히 앗아가 버린 그 밤의

정적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살해하고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티끌로 바꾸어 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비록 저주를 받아 하나님 자신만큼 오래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이런 일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결코"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 속에서도 아직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비열한 본성을 다스리고 우리 속에 있는 사탄을 죽일 수 있는가 알아보시려는 것이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우리를 이렇게 극심하게 벌주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젤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어느 날 수용소에 있던 발전소가 폭발되었다. 게슈타포가 수사한 결과 세 명의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일벌백계의 원칙에 따라

수용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 명이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명은 "슬픈 눈을 가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어린

소년이었다.

 

밧줄이 목에 감기고 발밑에 놓여 졌던 의자가 없어지자 어른들은 "자유만세"를 외친 후 금방 죽어 혀를 빼물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체중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금방 죽지를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밧줄은 30분 이상 움직였고, 수용소에 있던 모든 이가 생사를 오가면서 죽어가는 그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

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벌어지는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누군가 외친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위젤은 자기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어디에 계시냐고? 그는 여기 계시다 여기 이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되고 있다"

(Where is He? He is - He is here on this gallows.........)

 

물론 위젤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그가 천진난만하게 가지고 있던 전통적 유일신관이 영원히 무너져 버리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런 신은 그에게서 죽어버렸던 것이다.

 

****

 

왜 이런 내용의 글을 인용해 와서 글을 쓰는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종교만능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어서이

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독실한 신앙인들은 모든 문제를 종교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고 한

다.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종교의 힘을 이용하고자 한다. 심지어는 통일도 기도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의 통일은 신의 뜻이 아닌 남북 당사자의 의견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利害關係)와 역학구조(力學構造)에 의해서 결정

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통일을 기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순진한 종교인들의 생각인 것이다.

 

내가 어려서 종교생활을 할 때도 조국통일을 위한 철야기도나 새벽기도 등을 숱하게 하였고 순진하게도 기도를 열심히 하면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철이 들면서 신에게 기도를 한다고 하여 통일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던 기간이 순수의 기간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시간을 도둑 맞았던 기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세상의 다른 민족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들도 세상의 보편(普遍)적으로 통용

되는 힘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다른 민족과 다름이 없었던 것처럼, 어떤 신을 믿어서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도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힘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대민족의 교훈은 모든 종교에 다 해당 되는 것이며 모든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속에서 있었던 일이나 현

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냥 보지 말고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정말 현명한 불교인이라면 대웅전에 방화를 하는 승려를 보면서 정신이상자의 행동으로 보지 않고 왜 승려가 불을 지를 수 있

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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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아래는  R ivers of Babylon의 가사로 시편의 내용과는 다르게 개사를 해서 불렀다.

그런데 어찌 이런 내용의 곡이 디스코 곡이 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요지경 속이 아닐 수 없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바빌론의 강가에

우리들은 앉아 있었어요

그래요 우린 시온(천국)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Required from us a song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사단이 나타나 우리를 납치해 끌고가

우리에게 노래(찬양)을 요구했어요

자, 그때 우리가 어떻게 이방의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겠어요.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Required from us a song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Be acceptable in the sight here tonight

 

우리들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오는

언어와 마음속에 영그는 명상을

오늘밤 주님의 눈앞에서 거두어 주소서.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Be acceptable in the sight here to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