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을 위한 글

벌초는 결국 순리를 거스르는 것???

뿅망치 2021. 7. 20. 21:19

지난 토요일 동생들과 혹시 벌초 할 일이 있을까 하여 시골 부모님 산소에 다녀 왔는데 가물어서인지 봉분과 주변에 풀이 자라

지 않았다. 그래서 예초기는 돌리지 않고 봉분 아래 있는 평평한 곳에 있는 아카시아만 뽑았는데 아카시아를 뽑으면서 참으로

신기(神奇)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신비(神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월에 와서 봉분의 잔디를 보완할 때는 아카시아를 본 적이 없었는데 군데군데 아카시아가 무릎만큼 자라 있었다. 아직 뿌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손으로 뽑으면 뽑혀 올라오는데 어디선가 실뿌리가 연결되어서 그 뿌리 중간중간에서 싹이 텃던 것들이다.

 

그리고 언덕 주변에는 나무딸기들이 잔디 사이사이를 뚫고 올라와 있어서 낫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아예 손으로 뿌리를 뽑는데

산소 주변에서 제일 속을 썩이는 것이 아카시아나무와 딸기 나무이다.

그리고 참나무도 한 몫을 하는데 굴러온 도토리 대부분이 싹이 터서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수시로 뽑아 주어야 한다.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이 얼마나 끈질긴 생명력과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지 벌초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산에 산소를 쓰게 되면 주변의 나무를 베어내고 산소를 쓰게 되는데 참나무나 소나무를 베어내면 제일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이

딸기 나무들이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절대로 뿌리를 뽑을 수 없는 아주 끈질긴 식물로 씨로도 전파를 하지만 뿌리를 통해서

전파를 하기 때문에 실뿌리 하나만 있어도 보란 듯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뿌리로 전파하는 식물들이 대부분 그런데 아카시아도 그런 셈이다.

 

식물생태계는 천이(遷移)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황무지에서→초원→관목→양수림(陽樹林)→음수림(陰樹林)을 이루게 되는

데 마지막 단계를 극성(極盛)이라고 하게 된다. 극성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천이가 일어나지 않는 소위 궁극의 단계인데 이 극

성도 결국 시간이 지나가면 불이 나든가 하여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서 이 천이의 과정을 되풀이 하게 된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이 산의 나무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랜 기간 동안 순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초원을 이루는 풀은 억세 같은 것들이 해당이 되고 관목(灌木)은 딸기나무 같은 것이 해당이 되며, 양수림은 햇볕을 좋아하는

소나무이며 음수림은 참나무 등 활엽수가 여기에 해당이 된다.

 

처음 만들어지는 산소는 황무지와 같은 상태지만 인위적으로 잔디 등을 심기 때문에 사람의 힘에 의해서 초원의 상태가 되고,

인간은 초원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자연은 천이(遷移)의 과정을 거치려고 하는 인간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셈이

다. 사람이 잔디밭에 있는 아카시아나 딸기나무를 제거하는 것이 천이의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다.

 

곧 이런 행위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로 결국 시간의 싸움에서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이길 수가 없게 된다. 산이 초원

에서 관목이 자라는 숲에서 큰 나무가 자라는 교목의 숲으로 진행되어 가는 자연의 법칙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유한(有

限)한 인간의 입장에서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우리 형제들도 아카시아뿌리를 뽑으면서 하는 말이 이제 우리가 늙으면 우리의 자식들이 조부모의 묘소를 돌보지 못할 것인데

그때는 어떻게 될까를 걱정해 보지만, 결국은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서 흔적이 없어지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하면서 이장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고 말게 된다.

 

우리가 여행을 하가다 보면 가끔 산에 아예 봉분과 주변을 콘크리트로 싸발라 놓은 무덤을 보게 되는데 자신의 부모의 무덤을

콘크리트로 싸바른 사람도 자신이 죽으면 자식들이 돌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한 끝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도 자연의 일부로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흉물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을 것 아

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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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에가서 아카시아 나무뿌리를 캐거나 여름 텃밭에 풀을 뽑다가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마음의 수양에 관한 생각을 해

보게 되는데 애초에 종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수양이 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텃밭에 풀은 아카시아나 딸기나무와는 달리 씨앗에서 싹이 트는데 뿌리 채 뽑고 나면 또 새로운 풀이 싹이 트는 것을 보게 된

다. 마치 흙이 잡초 씨앗으로 버무려져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뽑으면 또 새로운 씨앗이 싹이 트고 뽑으면 또 새로

운 씨앗이 싹이 트고....

 

한꺼번에 싹이 트지 않고 먼저 싹이 튼 풀이 뽑히면 또 나고 하는 것이 마치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아무리 수양을 하더라도 그

것을 방해하는 삿된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과 어찌 그리 흡사한지....

 

풀을 뽑으면서 드는 생각이 인간이 아무리 선량하게 살려도 맘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만 방심을 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은 아무리 선량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기독교나 불교등 모든 종교에서 선하게 사는 것을 그렇게 강조를 하고 방법을 알려 주지만 결국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거나 아

주 극 소수인 것을 볼 때, 처음부터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선한 기준은 불가능한 주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살려도 아무리 발버둥을 쳤어도 죽을 때는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한(悔恨)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

람들이 밭에서 잡초 뽑기를 제대로 했었다면 그런 회한을 안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아무리 뽑아도 새롭게 싹이 트는 잡초처럼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이 잡초가 돋아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깨달았

더라면 불가능한 목적에 인생을 걸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회한도 없었을 것 아닌가.....

마음에 오고 가는 생각들이 특별히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생각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낙

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종교인이거나 수행자이기 때문에 졸리는 것이나 먹고 싶은 생각, 그리고 이성이 생각나는 것이 수양이 부족해서라고 자책할 필

요가 없지 않겠는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가다가 보면 재미있는 결론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다가 보면 모든 생각의 결

론이 자연의 법칙과 연관되는 것으로 귀결이 되면서 저절로 철학적인 인간이 되며 자연에 거스르는 삶을 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많은 걱정과 고민들을 털어버릴 수가 있게 되며,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자연의 섭리로 이해와 체득을 하고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찮은 풀 뽑는 이야기를 가지고 너무 거창한 주제로까지 와 버렸는데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일 뿐이니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봐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