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우리집 제사 때 모인 자손들에게 프린트를 해 주고 읽어 준 내용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현대의 생활에 맞게 생각해 본다면 3가지 정도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인에 대한 기억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고인의 혈족이나 지인들로서 고인에 대한 기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가족으로서 그 기억은 고인에 대한 삷의 모습이 될 것이며 자신과 연관된 기억들입니다.
그 중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기억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좋은 기억들입니다.
손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을 고인과 같이 보냈던 자녀의 입장에 있었던 우리들의 고인 곧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실 그리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지금처럼 다양한 삶을 선택하면서 살수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가족은 가족을 평가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서도 안됩니다.
아버지가 어민의 속을 좀 썩혀 드리는 삶을 사시기는 했지만 인정도 많고 선량하게 사신 분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평가)하고 있는가에 따른다고 한다면 아버지는 선량한 삶을 사신 것으로 믿어도 될 것입니다.
철이 들어서 고인을 본 사람은 고인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어려서 같이 살았다면 특히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생활이 바쁘기 때문에 고인에 대한 기억을 늘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기일(忌日)을 통하여서나마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인과 관련된 혈족이 함께 모여서 서로가 혈족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쁜 현대생활에서는 한 집안 식구들도 얼굴을 보기 힘듭니다.
식구라면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식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가족끼리도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일을 만들거나 특별한 날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자손들이 얼굴을 자주 보는 것은 곁에 살지 않는 이상 어렵습니다.
출가한 자녀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은 부모의 생일이든가 기일 등 어떤 일들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이웃사촌이나 남들은 좋을 때는 같이 할 수 있지만 어려울 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에도 ‘좋은 일에는 남이요 궂은일에는 일가(一家)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제일 먼저 가족을 먼저 찾게 되고 형제자매를 찾게 됩니다.
고아나 형제가 없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들이 어려울 때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것과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혈족은 비록 오래 보지 못하였더라도 함께 살면서 나누었던 정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도 그 기억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기회를 통해서 그 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며 기일은 그런 날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지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매일 사는 것이 무엇이며 죽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이 세상에서 그런 생각만 하게 되면 생존경쟁에서 지고 맙니다.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이겨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삶은 그리 훌륭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삶의 목적이 죽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시간은 삶의 목적이 죽음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렇지만 삶의 목적이 죽음은 아닙니다.
기일(忌日)은 돌아가신 분 곧 삶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있지 않는 분의 돌아가신 날입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낼 때 그 분이 지상에 살아 있을 때처럼 음식을 차려 드리고 절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다른 세상에 있다가 이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시간만이라도 우리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할 지 못합니다. 그런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세상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죽어서 가는 또 다른 세상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구태여 선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또 고생스럽게 오래 살 필요도 없습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라든가 벌을 받는다든가 양심의 가책이라든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부모나 자식에게는 착한 아들로 착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 무엇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본능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아버지가 여기에 와 계시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와 계실 것이라고 믿고 모여서 제사를 지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바깥세상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깥세상은 엄연하게 존재하며 그 세상의 존재는 태어나야 비로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죽음 이후의 세상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뱃속의 태아가 자신이 언젠가는 태어나게 되고 태어나면 바깥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바깥세상에서 살아보지 않는다면 바깥세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죽음 이후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노력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태아에게 바깥세상을 설명하는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살면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은 이 거대한 우주를 존재하게 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이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힘이 그 사람의 삶을 좋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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