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鍊金術, Alchemy)은 근대 과학 이전 단계의 과학과 철학적인 시도로서 납(鉛) 같은 금속으로부터 금과 같은 귀금속을 얻는 방법을 연구하여 얻는 기술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연금술사(鍊金術師)라고 하는데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순수하게 납을 금으로 만들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연금술에 빠져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연금술로 납을 금으로 만듦으로 인해서 자신의 영혼도 납처럼 낮은 단계에서 금처럼 순수한 단계로 변화가 된다고 생각하여 연금술사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금술은 고유의 물질은 인공적으로 변화할 수 없다는 원소의 개념이 이해되기 전까지인 18세기까지 유행하였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라부아지에가 질량불변의 법칙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 당시의 과학자들 사이에는 물을 계속 증발시키면 흙이 된다든가, 밀가루를 가득채운 항아리에 저고를 벗어 넣어두면 항아리 안에서 쥐가 만들어져 나온다든가 하는 주장들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연소라는 개념이 물질과 산소의 결합이라는 것을 초등학생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연성 물질에는 플로지스톤이라는 입자가 있어서 연소과정에서 그것이 다 소모가 되면 더 이상 연소가 되지 않는다고 플로지스톤이라는 별도의 연소물질이 있다고 믿었었다.
연금술이나 과학자들이 주장했던 이런 내용들은 원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명의 발생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지금부터 300년이 조금 넘는 18세기 후반이다.
그러므로 2천년이 넘게 연구해 오던 연금술이나 믿어왔던 자연과학의 지식들이 과학과 지성의 발달로 인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나 천문학 철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들이 나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이제 이런 학문이 설 자리는 없고 서서도 안 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것이 2천년 이상을 인간으로 하여금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게 했던 천동설이다.
천동설이 현재의 천문학을 발전시키는 밑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假定)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인간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은 우주와 주변의 사물과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고 연금술에 평생을 바치는 일을 해 온 것이다.
왜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인간의 육신에 대한 부분은 과학적인 분야이므로 과학적으로 접근을 하면 언젠가는 뇌를 비롯한 육신의 기능을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이나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이 육신을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에 대해서 이성적이나 합리적인 접근을 통해서 이해하기 보다는 독선적(獨善的)인 주장을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수용하고 믿어온 것이 지금까지 인간과 종교의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역사가 수천 년(힌두교)에서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때 그 당시의 지적 수준에서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지적수준으로 본다면 무지한 상태라고 밖에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수준이라는 것도 오류 위에서 출발한 상식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판단하고 주장하는 것들도 오류의 토대위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들이 결국 그런 바탕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활동의 대부분이 뇌속이나 몸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나 전기 작용이며 그런 활동이 일어나는 동기의 대부분이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교리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선(善)과 악(惡)의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 잣대로 판단해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왔던 것이 인간에 대해서 무지했던 종교가 지금까지 인간에게 저질러 왔던 정신적 폭력인 것이다.
지금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서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허구이며 죄라고 주장하는 것이 부당한 것임이 밝혀졌음에도 그런 폭력을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종교인 것이다.
과학의 분야에서 종래(從來)에 믿어 왔던 대부분의 내용들이 잘못 믿어왔던 것이라는 밝혀지는 그 시점에서 사실 종교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과거의 교리는 과감하게 버리고 그 시대의 이성과 지성에 맞는 교리가 새로 개발되어야 했어야 맞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오늘날 인류가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고통과 종교로부터 억압 때문에 받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금술을 하는 목적 중에 연금술을 통해서 자신과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종교의 교리를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는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개처럼 되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서 본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서는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버릇을 가르치는 정도가 교육의 한계인 것이다.
종교의 교리를 하나님처럼 믿는 사람들은 종교의 교리가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변화를 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는 고양이나 개의 버릇을 고치는 것처럼 고작 그것이 종교와 교육을 통해서 할 수 있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나 폭력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종교나 교육의 힘으로는 다만 그 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순화시키거나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 있을 뿐....
종교를 내세(來世)의 보험으로 생각하는 유치한 사람들이라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겠지만 종교를 통해서 무엇인가가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종교를 통해서 무엇인가 변화된 사람들은 종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나 사건을 계기로 해서 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이지 종교의 교리가 그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종교가 인간을 변화시킨다거나 말씀이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종교나 말씀은 알지 못하던 것을 알려주는 것일 뿐 변화는 자신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런 환상도 종교가 만능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아직도 연금술에 매달리고 있는 연금술사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인간은 지금까지의 종교에서 엉터리의 교리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도 칼로 무 자르듯이 선과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교리보다 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도 15세기 이전의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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