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잘 살아가는 이야기

사람들은 용이 없음에도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까?..사람들은 실체가 없음에도 익숙하다는 이유로 실체가 없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뿅망치 2017. 9. 8. 10:30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공룡이 되지 않을까?

과거에 살았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을 공룡이라고 말하는데 아니라고 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매머드(맘모스)나 다른 멸종한 동물들도 많지만 가장 유명하고 친근한 동물로 공룡을 떠올리게 되는가 하면 그 생김새나 크기 종류들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영화나 다른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소개가 되다가 보니 친근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보는 공룡은 뼈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자료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살과 피부를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실지 영화 속에서나 공룡 박물관에서 보는 공룡의 모습은 실제와 닮았을 수는 있겠지만 실제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하도 많이 보게 되니 가장 무서운 육식공룡하면 쥬라기공원의 티라노 사우르스(티렉스는 폭군이라는 뜻이고 사우르스는 도마뱀이라는 뜻)의 그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목이 긴 초식공룡하면 마찬가지로 거기에 등장했던 브로키오 사우르스 등의 공룡들을 떠 올린다.

사람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주 접하다가 보면 익숙해지게 되고 실지로 보지 않았지만 본 마치 보고 살아왔던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게 된다.

 

공룡과는 다르지만 용(龍)도 마찬가지이다.

공룡은 실존했던 존재지만 용은 실존하는 동물이 아니고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이다.

역사적으로 용과 관련된 지명이나 건물들 전설 등이 하도 많다가 보니 용이 마치 실존하고 있는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살고 있는 동네가 용(龍)자와 관련이 있고 자신의 이름에 용자(龍字)가 들어가 있음에도 그 용이라는 동물이 실존하는 동물인지 상상의 동물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용이 실존하는 동물이라고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상상의 동물에 대해서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면서도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까?

 

용은 꿈에서나 환상가운데 나타나서 인간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상과 벌을 주기도 하는 존재이다.

꿈에 본 용들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는데 뱀과 도마뱀이 합성된 그런 존재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우리가 꿈을 꾸게 될 때 보는 내용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숙하게 보았던 내용들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어떤 것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동양에도 용이 있고 서양에도 용이 있지만 모양도 다르고 성격도 아주 다르다.

동양에서의 용은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서양의 용은 요한계시록에서처럼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악한 존재들이며 동양의 용은 날개가 없고 불도 뿜지 않는다.

만약 동양 사람이 용꿈을 꾸면 절대로 서양 사람들이 묘사하는 그런 용꿈을 절대로 꾸지 않을 것이고 서양 사람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 묘사하는 용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라면 동양의 용과 서양의 모습이 다를 리가 없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라면 어느 한 쪽이 틀렸거나 아니면 둘 다 틀렸거나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동물이라는 것을 이해를 하고 용이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왜 용에 대한 이야기를 지루하게 했는가 하면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종교 내에서의 교리차이뿐만 아니라 종교 간의 교리에 대해서도 분명히 한 번 정도는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성서를 중심한 종교가 부활을 하는 것과 동양의 종교가 윤회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대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아닐 것이고 죽어서 가는 곳이 달라질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한 쪽은 틀렸거나 아니면 두 쪽이 다 틀렸거나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심을 해보지 않는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자세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는 것과 신앙의 자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종교의 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상의 동물인 용을 끌어 왔는데 이 용은 실존하는 동물이 아닌 것처럼 종교의 교리 또한 용에 대한 설명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종교가 만들어지게 되는 인간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 때문이다.

누군가가 종교를 만드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세상을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를 자신의 종교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나오는 종교는 전에 나왔던 종교가 바탕과 참고가 되고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이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원리강론의 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교회에서 단독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의 종교의 이론들이 참고가 되었음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통일교회에서 나가서 새로운 종교를 만든 사람들 마찬가지로 이곳의 이론을 차용해서 자신의 생각을 더한 것이고....

 

그러나 결국 신학의 이론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그 근원되는 것이 실존의 사실인가가 아닌가의 문제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용을 실존한 것으로 간주를 하면서 사는데 익숙한 것처럼 사실여부가 불분명한 에덴동산의 사건에 대해서 설명한 내용들을 사실인 것처럼 간주하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은 같은 맥락이다.

 

만약 성서의 타락이나 구원 등의 내용이 인류역사에서 실지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이 이론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론이 되는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을 묘사하는 것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동물을 아무리 세밀하게 묘사하더라도 그 것은 잘 그려진 그림일 뿐 허구를 그린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종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