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창시자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자신만의 세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처럼 착각을 하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그런 세계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가상의 세계가 아니고 실존하는 세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종교를 이해하게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계가 지상계처럼 실존하는 세상이라면 지상에서 같은 분야에서 일을 했던 사람이나 같은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은 영계에서 서로 만나야 할 것이다.
실제로는 만나고 있는데 지상에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영계에서 서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영급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영계로 간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리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대부분 영형체급 영계나 생명체급 영계에서 머물기 때문에 거기에서 서로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끔 영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나 영계에서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에 의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들마다 다른 이야기들을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를 모르게 될 수밖에 없고 영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영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들에 현혹되거나 휘둘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세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던 종교들은 자신들이 설계해 놓은 영계를 세팅해 놓고 사람들을 협박이나 회유 등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에 초대를 하여 그 세상에 들어오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영계가 실존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유대교든 천주교든 개신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힌두교든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영계는 같은 설명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같이 설명하는 곳이 없다.
이러한 현상들을 자신이 선택한 종교는 옳고 다른 종교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하면 간단하기는 하지만 간단한 만큼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인들 중에는 자신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현명하며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성(靈性)도 더 많이 개발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라면 젊었을 적에 무협소설 한 두 번 안 읽어 본 사람들이 없을 것이고 지금도 무협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보면 9파 1방과 5대세가가 등장하는데 구대문파(九大門派)는 소림(少林), 무당(武當), 아미(峨嵋), 화산(華山), 곤륜(崑崙), 점창(點蒼), 청성(靑城), 설산(雪山), 공동의 아홉 문파와 1방인 개방(開幇)이 등장하고 5대 세가(世家)는 남궁(南宮), 하북의 팽(彭) 사천의 당(唐), 제갈(諸葛),황보(皇甫)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파나 세가 등은 존재하지 않고 무협소설을 위해서 작가들이 머릿속에서 상상(想像)해 낸 상상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소설은 판타지소설처럼 한 장르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우리나라에도 소설가 김훈씨의 부친인 김광주씨가 1961 년도에 ‘정협지’를 번안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로 지금은 무협소설의 원조나라인 대만보다도 더 많은 실정이다.
물론 소설의 내용에 등장하는 장소나 사람이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소설을 읽는 당시에는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의 어느 산자락에 가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곳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중국의 장강에 가면 무산이 있는데 무산의 봉우리를 강에서 올려다보면 선녀들이 사는 곳인 것처럼 생각되어질 정도로 신기하게 생겼다.
그런 봉우리들과 장강의 무협(巫峽)을 보면서 무산신녀(巫山神女)를 상상해 내기도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공상과학영화(science fiction movie空想科學映畵) 또한 영감(靈感)과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그리고 SF소설 등이 영감과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종교의 세계 또다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 계시(啓示)든 몽시 든 본인이 깨달았던 것이든 어떠한 것이라도 객관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주관적인 것으로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론은 결국 본인이나 그 후세인들의 사고력이나 상상력이 첨가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교리가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적인 지식은 대부분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장으로 시작해서 주장으로 끝나는 종교의 교리들과는 다르다.
종교의 교리들은 죽어서 직접 가보기 전에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참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본인들도 사실은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을 믿는다면 그 좋은 영계를 어떻게든 빨리 가려고 소위 와이로(蛙利鷺)라도 썼을 것이나 바람벽에 똥칠을 하더라도 이승이 좋다고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만약에 같은 종교에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세상도 모르고 다른 종교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고 다른 종교까지 다 섭렵한 다음에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어떤 사람이 더 바람직한 종교인이겠는가?
사람에 따라서 세상아무것도 모르는 철없을 때부터 종교생활을 한 사람은 영혼의 흠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더 좋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고 두루 지식을 갖춘 사람은 영혼의 상처는 있을지 모르지만 더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좋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前者)의 경우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종교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다.
소위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볼 줄을 모르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것을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무조건 믿어야지 ‘왜’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면 종교생활을 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아 왔던 것이 지금까지 선배종교인들이 걸어가면서 후배종교인들에게 했던 말이다.
자신의 지식에 반하는 교리나 지시나 일들은 당연히 ‘왜’ 라는 의문을 가져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언어의 유희에 굴복하거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등의 회유에 굴복하여 왜 라는 생각을 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영계는 실존하는 것인가 로부터 시작해서 어떠한 곳이며 왜 종교마다 설명이 다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만약 각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이 다 맞다면 영계는 확정된 어떤 것이 아니고 보는 이에 따라 변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종교가 다 맞고 모든 종교가 다 틀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은 지상에서 영계를 준비하라고 주장을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주문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런 주문들은 영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영계의 생활과 별로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다.
지상생활에서 선량하게 즐겁게 사는 것 그것 이상으로 더 준비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슨 헌금을 해야 하고 무슨 봉사를 해야 하고 무슨 충성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얼마나 덜 읽어야 하고.......
그런 조건들을 세우는 것은 일상에서 즐겁게 살면서 선량하게 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그런 세계를 만든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았거나 스스로 찾아간 사람들이다.
어떻게 그 종교와 만나게 되었든 이론으로 만들어진 그 세계에 대해서 자신의 시식과 지성과 감성으로 점검해 볼 필요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래는 와이로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
고려시대 때 이규보는 과거에 매번 낙방했다. 그는 집 대문에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한이다.(唯我無蛙 人生之恨)'라는 글귀를 써 붙였다. 어느 날 임금이 민정을 살피러 나왔다가 이 문구를 보게 되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임금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이규보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마침내 이규보와 마주앉게 된 임금은 대문에 붙어 있는 문구에 대해 묻게 되고 이규보가 이에 답하게 된다. "옛날에 까마귀가 꾀꼬리에게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3일 후에 노래시합을 하자면서 심판은 백로가 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노래에 자신이 있던 꾀꼬리는 좋다고 했습니다. 시합 날이 다가오자 꾀꼬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연습을 하는데 까마귀는 노래는 하지 않고 개구리만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3일 후의 노래시합에서 목소리가 거칠고 노래솜씨가 형편없는 까마귀가 이겼습니다. 까마귀가 백로에게 개구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규보가 불의와 불법으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이규보의 말을 들은 임금은 과거 보러가는 선비인척하면서 "며칠 후에 임시과거가 있다기에 개성으로 가는 길"이라며 이규보에게도 과거볼 것을 권했다. 임금은 환궁한 후 임시과거를 명하고 시제를 '유아무와 인생지한(唯我無蛙 人生之恨)'으로 내걸게 했다.이 임시과거에 이규보가 합격했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개구리 와'(蛙), '이로울 리'(利), '백로 로'(鷺) '와이로'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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