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슈케크에서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근처의 고대 도시인 오시로 가는 날이다.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이번에는 국내선 비행기로 이동을 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출발하는 비행기이므로 오전에는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제 저녁만 해도 트럭을 타고 젊은이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가곤 했었는데 아침에는 평온하고 사람들도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어제 광장 근처에서 다 보지 못한 곳들이 있어서 가 보고 싶지는 하지만 그 보다는 이곳의 재래시장을 가 보기로 했다.
중국의 카슈가르에서 시간이 없어서 재래시장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슈케크의 재래시장인 오쉬 바자르를 일행 몇 명들과 같
이 갔다.
전차와 버스가 그곳으로 가는 노선이 있어서 그 전차를 차비가 8(4?)숨인가로 너무 싸다(1숨이 20원 정도)
중요한 교통수단인 전차버스? ...요금이 무척 쌌었다.
오시 바자르에 도착을 하고...
비슈케크에 있는 재래시장의 이름이 왜 오늘 우리가 가는 도시인 오시(Ош..러시아문자)인지는 물어 볼 곳이 없어서 물어 보지 못
했다.
위구르의 카슈가르를 비롯하여 이슬람세력이 지배하던 중앙아이사의 재래시장은 바자르( BAZAAR)로 대부분이 비슷하며 이곳도
생필품을 비롯하여 식재료 등을 파는데 우리와 사는 지형과 기후도 다르고 생활 풍습도 다르기 때문에 시장에 나와 있는 농산물이
나 식품들이 신기하다.
시장 밖에 있는 노점시장...과일과 체소들이다
우리와 다르게 생긴 가지도
앵두와 불루베리?
이름모를 과일이 지천이다....처음보는 꽃이나 나무 과일을 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머루포도 같기도 하고...
속이 비치는
복분자와 산딸기...이곳도 뽕나무가 많아서 오디도 많을 듯...
채소코너인 듯...처음보는 채소도 있고
눈에 익숙한 채소도 보인다.
속이 비치는 포도 같이 생겼는데 포도는 아니고...맛을 보라고 주는데 무척 시다.
처음보는 과일이고 맛이 있다고 해서 샀는데..
시장 입구로 들어가고...
이쪽이 입구쪽인 듯.....우리는 다른 곳으로 들어갔다(인터넷)
빵가게...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파는 빵이다.
요란스럽게 생긴 튀김과자?
무엇을 사려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구경만 하는 중이다.
말린과일과 식용기름? 술?...이곳은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에 술을 팔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식용기름인듯 하다.
키르기스스탄에도 구소련의 고려인 이주정책으로 인해서 이곳까지 흘러온 고려인들이 일부가 있어서 시장에서 식료품을 파는 사
람들을 살펴보았으나 외모로 보아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반찬가게
또 다른 반찬가게.....물어 보지 않고서는 고려인들을 구분할 수가 없다. 고추가루를 사용한 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닌 것 같기
도 하지만 외모는 그냥 한국인이다.
냉장하지 않은 고기도 팔고...
눈이 돌아가게 많은 향신료
말린 과일을 파는 곳
까만 봉지에 파는 것이 무엇인지...다른 지역에서는 이것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것은 아닌 듯
치즈 관련 제품을 파는 곳
하얀 것은 양 젖으로 만든 치즈(?)볼로 무척 시다....간식으로 먹는다고 한다
꿀인 듯
곡류를 파는 곳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구분을 하기가 힘들다.
이곳은 고추가를 파는 곳??...혹시 고려인? 일행이 고추가루인지 들여다 보고 있다.
시장 건물 밖 골목...평일 오전이른 시간이라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꽃씨와 채소씨를 파는 곳도 있고...
별스럽게 생긴 호박도...
무슨 종류가 저리도 많은지...
수박 하나에 10솜이면 우리돈으로 200원이 되지 않는다.
식품을 사기보다는 숙소로 들어가서 먹을 과일 몇 개를 사서 들어오는데 버스차창 사이로 한글학교 간판이 보이는데 인터넷에서
보니 입학식과 졸업식 등을 한 사진도 보인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보이는 한글학교
인터넷에서 찾아본 한글학교 관련 사진
길거리 카페?? 이곳 사람들이 잘 사먹는 음료인데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모양과 색깔이 규격화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에서 허가를 받고 장사를 하는 듯
이곳에서도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네...
무엇을 하는 곳인지...재팬월드를 구글에서 검색을 해 보아도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숙소로 들어와서 시장에서 산 처음 보는 채소를 넣고 라면을 끓였는데 채소가 내가 생각하던 맛이 아니다.
시간이 좀 남았지만 숙소에서 쉬다가 마나스 공항으로 출발을 하는데 비행기로는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버스로 가
면 610㎞를 열 시간 반을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나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40여분 밖에 걸리지 않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11기간을 가야 한다....
카자흐스탄 국경에 가까운 도시 탈라스는 동양과 서양의 최초로 전투가 벌어져서 동양이 패배한 전투이다.
키르기스스탄을 들르는 여행객 중에서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탈라스라는 곳을 들러서 가야 할 정도로 이곳
은 인류역사에서 중요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눈으로만 보고 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https://youtu.be/MVq5kAwhUrg?si=Mn1BaizG4TYBgdv7...비슈케크...걸어서 세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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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탈라스 전투에 대해서...가능하면 읽어 보시길 권함
1. 개요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 근처에서 벌어진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간의 전투로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중국과 이슬람 제국의 전쟁이며, 중국의 서역팽창 저지와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인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전파
되어 유럽까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임.
당나라가 완벽하게 패배함으로써 실크로드 교역로를 포함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세력권에 넘어가게 되었다.
2 탈라스 전투의 배경
강력한 당 제국(618~906)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 했는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군사적인 점령보다는 일련의 무역협정과 명목상 보호령이라는 형태의 정책을 사용하였다.
640년 이후로 당이 마주한 가장 까다로운 적은 손챈캄포(Songtsan Gampo)가 세운 토번(티베트)이라는 강력한 티베트 제국이었
다.
현재의 신장(Xinjiang)에 해당하는 중국 서부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패권은 7~8세기 동안 중국과 토번의 뺏고 뺏기는 상황이 계속
되었으며, 중국은 또한 북서쪽에서는 투르크계인 위구르족, 인도-유럽어족의 투르판인들, 그리고 남쪽 국경에서는 라오스/타이족
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이 이러한 주위의 적들과 상대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초강대국이 중동에서 성장했는데 아랍인들에 의한 빠른 이슬람의 팽창
은 필연적으로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기득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3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탈라스에서의 결정적인 충돌은 페르가나의 또 다른 분쟁에 의해 촉발되었는데 750년 페르가나의 왕은 이웃인 석국(현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Tashkent 일대)의 통치자와 국경 분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중국에 호소하였고, 고
선지 장군이 출병하게 되었다.
원래 타슈켄트는 수 · 당 시대에 중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였었는데 지리적으로 당과 아랍-이슬람의 양대 제국 사이에서 놓여 있었
기 때문에 양쪽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강한 세력에 사대주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고선지는 타슈켄트를 포위했고 타슈켄트 왕을 속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약속과 달리 장안으로 연행된 타슈켄트 왕은 처형을 당했
는데, 타슈켄트 왕의 아들이 탈출하여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Abu Muslim)에게 사건을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
였다.
아부 무슬림(Abu Muslim)은 메르브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동쪽으로 행군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 장군과 합류하
였다. 이슬람은 이 지역에서의 아바스 왕조 이슬람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3 탈라스 전투의 전개
탈라스 전투 ... 탈라스 전투 전 양측 군대의 경로. 빨간 화살표가 당, 파란 화살표가 아바스 왕조이다
이슬람 군의 침공계획을 먼저 알게 된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에서 한족과 이민족으로 구성된 3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는 길에
안서지역의 서역 병사 3만 명을 합류시켜 탈라스로 갔으나 1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린 지야드 이븐 살리흐에게 기습공격을 당하게
된다.
751.7월 5일 동안의 전투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의 군대는 2만이 포로가 되고 대부분이 전사를 하였으며 고선지를 비롯한
소수만 살아남았다.
당나라의 가장 큰 패인으로는 군대의 숫자도 적었지만, 전쟁 중에 서역병사로서 전투에 참여한 투르크계 카를룩(Qarluq)이 배신을
하여 아바스쪽으로 돌아서면서 내부에서 당나라를 공격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의 전쟁 포로들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Samarkand)로 보내졌다.
4 탈라스 전투의 결과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이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승리를 거둔 이슬
람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만 명이 몰살당하고 2만명이 포로가 된 한 중국 측에서도 당의 쇠퇴기가 시작되는 한 부분으로서 이 전투를 단편적으로
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북중국에서는 거란이 당의 군대를 격파했고, 지금의 윈난성인 중국 남쪽에서는 타이/라오스 민족이 봉기하였다.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내전 수준이었던 755~763년의 안사의 난(安史─亂)은 당 제국을 더욱더 약화시켰다.
763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국 내부의 극심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751년 이후 중국은 타림 분지 너머에 영향력을 미칠 여력이 없어서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청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는 탈라스 전투 후 250년 이내에 대부분의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으
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내용은 포로로 잡힌 군인들 중에는 숙련된 장인들이 많았었는데 그 중에 제지 기술자들이 포
함되어 있어서 이슬람 세계에 종이만드는 기술을 전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유럽까지 제지 기술이 전파되어 서양에 제지 기술이
전해지게 된 것이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기록을 하던 글들이 제지에 인쇄가 되므로 인해서 중세 유럽의 과학, 신학, 인문학 등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다.
https://youtu.be/q9ZDCWWxV1w?si=ijM1SiQzQz-ntAdV....탈라스 전투 유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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