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고민은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할 일이란 뜻 앞에 보람 있는 일로서 인류 앞에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에게 정년퇴직의 제도를 둔 목적은 후진들에게 일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은 그만하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살게 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옛날의 힌두교에서는 남자가 결혼을 하여 자녀를 양육하고 난 다음에는 목샤의 길을 시작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목샤란 신과의 합일이나 신의 실재를 깨달아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작정하고 도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도 먹고 살기가 급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래서 먹고사는 현장에서 강제로 은퇴를 하게 한 것이 정년퇴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정년퇴직 이후에는 사실 경제활동에 힘쓰기 보다는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처럼 목샤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 인생을 즐기는데 허비하거나 설령 도의 길을 찾아 가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이미 정년퇴직을 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고 아직 정년퇴직을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정년퇴직을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두어야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정년퇴직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당연히 생각해 보았으며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두 가지를 하고자 했었다.
하나는 국세청에서 35년간 근무했던 전공을 살려서 비영리 재단 같은 곳에서 보수가 없더라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얻은 지식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바라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뜻이나 후배들을 위해서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을 많이 아쉬워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그럴 자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눈을 부릅뜨고 변해가는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세상에 되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길러서 그 미래를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 것이며 지금 되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가치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종교관들은 무너지거나 상상을 못할 정도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를 유발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먹고사는 문제 와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는 문제이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의 가치관이나 도덕관 그리고 종교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오늘 인터넷에 뜬 기사 때문이다.
프랑스의 86세 나는 노부부가 안락사를 금지시키는 프랑스의 법에 항의하여 비닐봉지를 쓰고 동반자살하면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자신들 대신에 프랑스 법정에 안락사를 허용해 달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지금 대두된 것은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야기되었던 문제들로서 이제는 피할 수가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락사나 존엄사 자살 등의 단어는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용납을 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인간의 생명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인간들이 결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명을 죽음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신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천주교에서 피임이나 낙태를 용납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간에 의해서 태어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앞으로는 더욱더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에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져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생명관이 변할 수밖에 없어질 것이고 따라서 가치관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도덕관이나 종교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종교적이든 비도덕적이든 상관이 없이 사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런 사회에 대해서 그것은 비종교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아무리 소리쳐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결국 종교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고 지금까지의 가치관도 힘을 쓸 수가 없다.
현실과 맞지 않는 종교의 주장이나 도덕적인 가치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가정(家庭)의 의미나 부부(夫婦)의 의미도 변하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혼을 하거나 사별을 하는 것 때문에 부부 중에 한 사람이 혼자 살아갈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늙어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하는데 여러 가지 상황들이나 여건들이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이 예측하기를 2040년쯤에 가면 간통죄가 자동적으로 없어지게 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가정이 지금의 형태와 많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우리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한 쪽이 그렇지 않은 한 쪽을 맞아서 살게 되고 또 남은 한 쪽은 또 젊은 사람을 맞이하고...
물론 현재와 같은 일부일처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형태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은 인류가 번식보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 단위로 그 당시의 환경에 맞게 그 형태가 변해 왔으며, 지금도 환경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모계중심사회로 살아가는 오지 같은 곳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정의 모습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가정의 형태들도 환경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 다시 모계사회로 회귀(回歸)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들이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발생하는 육아문제 때문이다.
육아는 다음 세대를 이어가야 하는 가장 큰 명제이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설령 맘에 들지 않더라도 사회적 여건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나이가 60이나 70이 된 사람이 어렸을 때와 젊었을 때, 그리고 지금의 때 가정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미래학자들이 그렇게 예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즈음은 돌싱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돌싱이라는 말은 돌아온 싱글이라는 말로 사별했거나 이혼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미혼들이 결혼하는 것을 지금은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에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2세들도 돌싱과 미혼이 아무렇지도 않게 축복을 받고 있는 것도 세상의 변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갈 것이며 우리는 그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고민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가치관의 잣대를 가지고는 그 것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많은 혼란스러움을 겪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지는 불들.....
안락사니 존엄사나 명예로운 자살 등 이런 문제들이 잇슈가 될 것이며 그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다가 오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문제가 닥치게 되면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살을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락사나 존엄사를 택한 사람들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신의 섭리를 거역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 중 대부분은 최선의 선택을 한 사람들일 것이다.
본인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선택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심정적(心情的)으로는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중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종교적인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 두 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된다. 이중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편리한 대로 잣대를 내미는 사람이다.
마치 딸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며느리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다른 시어머니처럼...
이것은 참된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비겁한 종교인의 모습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觀)이 변하게 되면 종교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며 우리교회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재천(在天)인가?
인간의 생명은 재인(在人)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이 부분부터 본인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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