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사파리투어를 하고 오후에도 잠깐 사파리 투어를 하도록 일정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봐야 할 동물들은 다 본 셈이어서 마사이마을로 곧바로 가기로 했다.
마사이마을은 우리가 들어왔던 국립공원 게이트 앞에 있는 마을로 그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
올 때는 다른 길로 오게 되어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곳이어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동물들도 보인다.
사파리 투어에서 나오는 길에 보이는 마사이들
마사이 마을에 있는 자동차 수리점 (?)..세차도 하고 바람도 넣고...
마사이 공연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한문 간판이 붙어 있는 켐프...중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것인지 중국인이 운영하는 것인지...
마사이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사이족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무 밑에 있는 마사이가 이 곳의 우두머리인 듯..나이도 적은데
나무그늘 아래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의자에서 기다리고..
오른쪽의 보라색 채크 망또가 무어인가를 지시하고
그들은 공연준비를 한다.
마사이 족은 현재 약 35만 정도가 남아 있고 케냐 중앙고원과 탄자니아의 중앙평원에 살고 있으며 인종학적으로는 니그로이드(Negroid), 파라 나일로트 족이고 언어는 나일로 사하란
어를 쓰며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고 그들의 신(神)인 은가이(Ngai)를 믿고 살아간다고 한다.
아래는 사전에서 설명되고 있는 마사이족에서 설명하고 있는 마사이족이다.
나일로트계(系) 흑인종이다. 평균 173 cm의 큰 키에 고수머리, 단정한 용모에 암갈색 피부가 특징이다. 남자는 송아지나 염소가죽으로 된 케이프를 걸치고, 여자는 케이프나 스커트를 착용하며, 머리는 붉은 흙으로 굳힌 독특한 모양의 헤어 스타일로 꾸민다. 주거는 반원형의 낮고 작은 진흙집으로, 우기(雨期)에는 모피(毛皮)를 지붕에 덮는다. 남자들을 중심으로 몇 가족이 작은 마을을 이루어 100∼200마리의 소 외에도 염소 ·양 ·당나귀 등을 사육한다.농경은 하지 않으며, 소의 생혈(生血) ·젖 ·고기를 식용한다. 소는 그들의 독점물이라는 부족의 신화(神話)에 따라 부당하게 소를 소유하고 있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약탈하여 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토테미즘을 신앙하고, 씨족외혼(氏族外婚)을 행하며, 사회조직은 남자를 중심으로 한 연령집단으로 이루어진다. 남자는 15세 전후에 할례(割禮)를 받은 다음 연령집단에 가입하여 전사(戰士)가 된다. 전사는 소의 약탈과 다른 종족의 습격을 방어하는 것이 임무이며, 타조의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고 긴 창과 방패로 적과 용감하게 싸운다. 전사는 미혼여성에 대한 성적 자유, 우유와 쇠고기 등을 어느 가정에서나 요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우리가 방문하는 마사이 마을은 마사이마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들르는 곳으로 그들이 사는 곳과 그들의 공연을 보게 되는데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공연료를 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곳에 사는 마사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어서 가이드와 공연료 흥정을 하고 공연을 하는데 의자가 설치된 야외공연장(?)에 앉게 하고는 마사이 남자들이 공연을 하는데 사실 돈을 주고 관람하기는 아깝다.
공연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줄을 맞추고 있다가 뛰어 오르는지도 모르고 구경하는 입장이어서 그냥 마사이 마을을 방문한 것으로 만족을 하는 눈치이다.
본래 마사이 춤을 추는 사람들은 마사이 전사들로 ‘모란’이라고 하는데 사냥을 하고 난 뒤에 그 피를 마시고 춤을 추게 되면 트렌스(무아) 상태에 빠지게 되고 트렌스 상태에 빠진 모란이 앞으로 나와서 뛰어 오르게 된다고 한다.
그 춤을 보여 주는 것인데 별 성의가 없이 잠깐 형식만 취하고 관광객들과 사진만 찍어 준다.
원을 돌면서 춤을 추고
흥이 많은 일행들도 참여를 한다.
망또로 빌려 입고..
이렇게 같이 뛰면서 공연이 5분도 체 안되어 공연이 끝이 난다.
그 공연이 끝나고 나면 토담집이 몇 채가 둥그렇게 지어져 있는 광장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불을 피우는 것을 보여 주는데 나무에 나무꼬챙이를 끼워서 손으로 돌려 순식간에 불을 피운다.
그것이 끝나면 사람들을 그룹별로 나누어서 그 집 주인들이 그들이 사는 집 내부를 보여주는데 가운데는 마른 소똥을 이용해서 불을 피우는 곳이 있고 잠을 자는 곳들이 있지만 사람이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할 말 이 없다.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마사이남자는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든 사람들이 눈이 충혈된 것은 연기 속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을 구경하고는 그 집을 구경한 대가로 팁을 주게 되는데 집을 구경한 대가라기보다는 기부하는 마음으로 주게 된다.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던 마사이...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이 가족들이 키우는 소들도 보이고 아이들도 보이는데 다 한 가족이라고
빙 둘러서 집이 있고 가운데 공터가 있는데 아이들은 이곳에서 논다....어린아이 사진을 찍는 일행들
200여명 되는 사람들이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사람의 자손들이라고 한다. 부인이 몇 명인지
둘레 둘레 집이 보이고 울타리 같은 것은 소를 가두어 두기 위해서이다.
불을 피우는 것을 보여준다.
동생을 업고 있는 여자 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눈빛인지...
마사이 남자들의 다리가 보통 사람들의 팔뚞 같이 가늘어저 일부러 한 장
아랫동네에 사는 여인들로 땔감을 해가지고 가는 사람들...물은 아이들과 여자들이 노란 물통을 가지고 물을 길어 오는데 우리가 볼 때는 흙탕물로 먹으면 곧바로 중병에 걸리게 생겼다.
또 다른 아주머니들...광장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다.
집구경이 끝나면 이번에는 기념품을 파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데 여자들이 악세사리나 마사이 망토 등을 관광객들에게 파는 가판대이다.
가판대에 진열할 동안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마도 공연의 일종인 것 같으나
성의도 없고 내용도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팔 물건을 가지고 가판대로 가는 아이들
이 아이의 물건을 샀는데 팔찌와 목거리 두개를 샀다.
마사이 여자들의 공연...노래 한 번으로 공연이 끝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물건들을 팔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판대..구경하는 것이 미안하다.
가판대를 둥그렇게 만들어 놓고 죽 늘어서서 30여명이 체 되지 않는 관광객을 상대로 열대여섯 명이 넘는 여자들이 전을 벌려 놓고 있는데 아무것도 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것을 보는 것도 안쓰럽다.
기념품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고 우리가 가고 나면 다른 관광객들이 오겠지만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방문한 이곳은 200여명이 사는 곳으로 한 사람의 자손이라고 하며 몇 대가 같이 사는 곳으로 광장을 중심을 토담집들이 지어져 있고 가운데는 소들을 키우는 광장이 있다.
마사이족들은 일부다처제의 제도로 살아가는데 자손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소를 많이 기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그들의 신인 ‘은가이’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소를 많이 길러서 소의 숫자를 늘려 ‘은가이’가 만족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소를 많이 기르려면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손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자신들이 기르는 소를 잡아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란들이 다른 부족이 기르는 소도 약탈해 오는데 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래서 본래 그들의 주식은 우유와 가축의 피가 주가 되며 건기에는 약간의 곡식을 먹고 고기도 다치거나 병들어 죽게 된 고기만 먹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현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마을은 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곳의 아이들도 아마도 학교에 갔는지 아주 어린아이들과 어른들 말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도 결국 문명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들만의 생활방식으로는 살아가기 힘들게 되될 것이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인디언이 그랬던 것처럼 마사이 지도자들이 그나마 살기가 좋은 땅들을 신흥재벌들에게 불하하고 자신들은 그 돈으로 도시로 나가버리고 많은 땅들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그들의 터전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마사이족이 점점 사라지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도 세월이 지나가서 언젠가는 문명사회로 돌아와야 한다면 하루 빨리 문명사회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들의 삶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비참한 삶이다. 혹자(或者)들은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끼고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憐憫)이 없는 사람들이다.
공연을 하는 곳에서 보이는 마을에 건물이 보이는데 학교 인 듯...
학교를 다녀 오는 소녀들
학교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이 멀리 보인다.
죄측에 보이는 파란 집이 클럽이며 레스코랑이라고 간판이 써져 있다....달리는 차에서 찍어서 ...
맨 좌측 로얄 워크 샾은 자동차 수리점이고 마라 카페는 커피 숖이며 달라스 는 펍이다...내부는 어떤지 궁금하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만난 씩씩하게 걸어가는 마사이 여자
저녁은 본래 우리가 묵는 롯지에서 먹어야 하는데 우리의 롯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롯지에서 염소 바비큐를 해 놓고 우리를 초대한다고 한다.
가는 길은 포장도 되어 있지 않고 길도 험하여 가까운 거리지만 시간이 한참 걸리며 가는 도중에 마사이 마을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곳에 도착하여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을 보니 마사이 사람과는 전혀 다른 체형으로 뚱뚱한 것이 케냐에서 가장 많은 부족인 키쿠유 부족처럼 보인다.
나이로비에 있는 사람들은 여자들은 엉덩이가 크고 통통하게 생겼고 남자들은 좀 무섭게 생겼는데 이 사장님도 그런 모습이다.
아마도 마사이 지도자들로부터 땅을 불하받은 신흥재벌 정도 쯤 되는 것 같다.
우리를 인솔해 온 여행사와 잘 아는 사이라서 대접한다고 하지만 앞으로 여행사가 마사이마라로 찾아오게 되면 자신들의 롯지도 이용해 주기를 바라는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얻어먹는 입장이니 고마울 따름이다.
염소를 마사이식 바베큐로 만들고 있다
길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의 가축들은 살이 별로 없었는데....
테이블 마다 고기를 날라다 주고 계속 리필 해준다.
염소는 마사이식으로 바비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것 말고도 옥수수 가루로 빵처럼 만든 케냐인들이 즐겨 먹는다는 ‘우갈리’와 양파로 만든 셀러드가 있는데 우갈리는 아무런 맛이 없어서 맹 맛이다.
맥주와 콜라는 우리의 돈으로 사서 먹는데 고기는 느끼하지도 않고 해서 맥주안주로 안성맞춤이다.
고기와 곁들여서 먹으라고 염소뼈를 고아서 만든 스프를 만들어주는데 소화가 잘 된다고 하며 한 컵씩 따라 주는데 몸에는 좋은지 모르겠지만 비위가 약한 사람은 먹기가 쉽지 않다.
음식을 서빙해 주는 마사이
가운데 빵 같이 생긴 것이 우갈리이다.
염소를 삶은 물에 이곳 사람들이 먹는 향신료를 넣고 나무막대기를 넣어서 거품이 나도록 돌린다....염소 고기를 먹었을 때 소화가 잘 된다고 하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은 먹기가 힘들다.
각 테이블은 같이 온 일행들끼리로 그간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나무 밑에 들어가서 음식도 먹고...
식사를 대충 끝내고는 식사준비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나와서 마사이 춤을 추는데 오후에 마사이 마을에서 보았던 춤과 같은 춤이지만 훨씬 더 정통적인 춤을 춘다.
자세히 보면 그냥 추는 것이 아니라 웨이브가 절묘하게 들어가면서 원을 그린다.
낮에도 그랬던 것처럼 술을 한잔씩 한 사람이나 흥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모닥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전사들의 춤을 추는데 흥이 많은 일행 한 사람이 같이 춤을 춘다.
노래가 끝나자 역시 뛰어 오르고..
우리를 초대한 사람과 기념사진... 포스가 느껴지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나하고 한 조가 된 일행들만)
우리를 위해서 음식을 장만해 주고 춤도 추어준 일행들과 기념사진
숙소로 돌아와서는 어제 불을 켜 놓아서 나방이나 딱정벌레가 많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서 아예 불을 켜지 않고 간단하게 샤워만 하고 잤더니 아침에 벌레 죽은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사이 마을의 공연(?)...일인당 15불씩 주고 보는 공연인데
여자들의 공연(?)
저녁 식사후에 공연을 하는데 돈 주고 본 공연보다 열 배는 낫다.
춤추면서 걸어가는데 앞 뒤로의 웨이브가 장난이 아니다....
마사이 전사들의
다음은 마사이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지성인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 보시기를...
마시이를 올바로 이해활 수 있을 것이므로...
마사이족 : 아프리카 동부 케냐와 탄자니아 경계의 가시나무가 많은 초원에 거주하는 주민. 나일로트계(系) 흑인종이다.
아프리카 소수민족인 마사이족이 자기 부족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문화를 본 따 상품을 만든 기업들을 상대로 지식재산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식재산권이란 자신이 만든 발명품, 상표, 작품 등에 대해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다.
영국 일간신문 파이낸셜타임스는 “마사이족이 자기 부족의 이름을 허락 없이 붙여 상품을 판매한 기업에 소송을 통해 지식재산권 사용료를 요구한다”고 최근 보도했다.
현재 35만 명으로 추정되는 마사이족은 탄자니아와 케냐 국경지대에 살며 큰 키와 용맹함으로 유명하다. 소를 기르기 위해 물과 초원을 멀리 찾아다니는 마사이족은 하루에 흙길을 3만 걸음 이상 맨발로 걷는 것으로 알려진다.
세계적 패션브랜드인 루이뷔통은 붉고 푸른 체크무늬의 토가(도포)와 더불어 구슬 장식을 이용한 스카프를 내놓았는데, 이는 마사이족의 고유한 의상문화와 흡사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마사이 컬렉션’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사이 족
[Maasai]
만년설의 영봉 킬리만자로(해발 5,895m) 주변, 탄자니아와 케냐 국경지대에는 현대 문명을 등지고 초원 고산시대에서 소와 양의 목축을 주업으로 토속신앙과 원시사회를 지키며 살아
가는 소수 부족인 마사이(Masai)족이 거주한다.
부족명 | 마사이(Maasai) |
인구 | 약 35만 |
거주 지역 | 케냐 중앙고원, 탄자니아의 중앙평원 |
인종 | 니그로이드(Negroid), 파라 나일로트 |
언어 | 나일로 사하란어(Nilo-Saharan)족 파라나이로트어(Para-Nilotic) |
생업 | 목축 |
종교 | 토속신앙 |
기원(基源)
마사이족은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 중앙고원에서부터 탄자니아의 중앙 평원 그리고 나일강의 원천인 빅토리아 호수 근처까지 넓게 퍼져 산다. 인종적으로는 파라 나일로트(Para Nilot)계 목축민으로서 나일로 사하란(Nilo-Saharan) 어족에 속하는 합계의 마아어 방언을 구사한다. 현재 총 인구수는 약 35만으로 추정되며 케냐측에 25만 탄자니아측에 10만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들 마사이족이 역사적으로 어디서 왔느냐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일부학자는 이집트 근처의 나일강 하류로부터 점차 남하해 왔다고 한다.
그 근거로서 마사이족의 복장이 붉은 색이며 그들 사회의 청년층으로 구성된 전사(戰士) 차림과 칼, 창 등 무기가 고대 로마 병사들의 것과 닮았다는 점을 들어, 마사이족이 로마 병사들의 후예이거나 아니면 로마군에게 고용되었던 흑인병사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종교(宗敎)
마사이족의 신화는 다른 소수 부족들의 창세신화와 거의 비슷하다. 옛적 태고시절 하늘나라에 마사이족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요, 그들의 말로 '은가이(Ngai)' 즉, 신(神)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아이들이 하늘나라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지상의 세계가 매우 아름다워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상을 동경한 나머지 아이들은 아버지 은가이 신에게 허가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한 집단이 밧줄을 타고 천국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은가이 신은 아이들에게 명령하였다. "너희가 지상에 내려가되 결코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잡아먹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소와 양과 염소를 내려 보낸다. 이 짐승들을 길러 그 젖을 먹고 살아야 한다. 내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동물을 해치거나 잡아 먹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예, 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밧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며칠이 안되어 아이들은 은가이 신의 명령을 어기고 어느날 그만 사슴 한 마리를 잡아먹고 말았다. 하늘나라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 은가이 신은 격분했다.
"저놈들이 내 말을 거역하다니…" 하면서 하늘나라에서 타고 내려간 밧줄을 잘라버렸다. "너희놈들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겼다. 너희들은 사슴을 해친 죄로서 하늘나라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벌을 받을지어다." 이에 놀란 아이들은 은가이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버님,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다른 짐승을 잡지 않겠으니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밧줄을 내려주소서." 그럼에도 은가이 신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너희는 이대로 하늘에 되돌아 올 수 없다. 다만 내가 함께 내려보낸 소와 양과 염소를 너희가 지상에서 열심히 길러 내가 만족할 만큼 그 숫자가 증가했을 때, 나는 너희들이 하늘나라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밧줄을 내려줄 것이니라."
물론 이 신화는 조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구전되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마사이족에게 은가이 신이 남긴 마지막 말씀에 따라 하느님이 만족스러워할 때까지 소와 양과 염소를 열심히 기르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며 신앙이 된 것이다. 그래서 마사이족은 소와 양과 염소를 방목하고 특히 소에 최고의 가치관을 둔다. 소를 치기 위해 그들은 계절에 따라 물과 초원을 찾아 이동한다.
생활(生活)
그러나 마사이족은 역사와 환경의 변천에 따라 인접 부족들과 빈번한 마찰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즉 케냐의 다수부족인 키쿠유, 캄바, 메르족(이들은 반투계의 농경들과 수렵민들이다)과는 장기간의 전투를 계속했다. 이들 농경민과 수렵민은 마사이족의 습격에 공포감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잦은 접촉으로 그들과의 혼혈아가 늘어났고 공통되는 습관과 사회제도도 많아졌다. 그 결과 마사이족은 오늘날까지 순수한 그들의 전통문화와 고유풍습을 보존하기 어려웠으며, 학계에서는 마사이족을 단일 부족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여 이들을 10여 개의 집단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케냐 북부의 삼부르족이나 탄자니아 메르산 근처의 아르샤족 등은 마사이족과 유사한 부류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마사이족을 만나기 위해 섣불리 애쓰다가는 자칫 유사부족 즉 가짜 마사이를 접하기 일쑤라는 뜻이다. 옛부터 구전되어오는 신화도 부족별로 조금씩 다르다.
또 차림새로도 부족을 구별할 수 있다. 즉 마사이의 옷은 유별나게 붉은 색깔이다. 청년 전사조는 창과 방패를 들고 다니며 중년조와 장로들은 허리에 오랄렘이라는 쌍날단도를 차고 오른손에 무기의 일종으로 골프클럽처럼 생긴 이린칸(스와힐리어=오링가)라는 나무방망이를 들고 왼손에는 은구디라고 하는 소치는 막대기를 가지고 있다.
마사이족은 한 집안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우선 1개월간은 비밀에 붙여 이웃이나 마을에 알리지 않는다. 1개월이 지나 갓난 아이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면 비로소 아기의 탄생을 외부에 알린다. 만일 그 아기가 비정상적 장애아일 경우는 죽여 없앤다. 남녀할 것 없이 나이 3살에서 6살까지 귓불에 구멍을 뚫고 무거운 쇠붙이를 달아맨다. 귓불이 길게 늘어날수록 미남 미녀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사이족은 귓불이 심할 경우에는 귀 전체의 길이보다 2~3배 더 길어져서 늘어난 귓불은 본래의 귓전에 한바퀴 감는다. 남녀 공히 귀고리로 장식해 다니며 남녀 모두 머리를 중처럼 삭발하지만 청년 전사들만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몸에는 붉은 색상을 바르며 구슬로 엮은 목걸이로 몸치장을 한다. 젊은 청년의 경우 전사(戰士)라는 이름으로 '모란' (Moran)이라고 호칭되며 이들은 붉은 천으로 국부와 둔부만을 가린채 알몸에 단도를 차고 창과 방패를 들고 다닌다.
식습관(食習慣)
마사이족의 주식은 우유다. 우유를 발효시켜 치즈처럼 만들어 먹는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약간의 곡물을 먹기도 한다. 환자나 산후 조리를 위해 살아있는 소의 목에서 피를 뽑아 우유에 섞어 마시기도 한다. 쇠고기 등 육식은 터부가 아니다. 그러나 소와 양들을 사육하는 신앙 때문인지 가축을 일부러 죽이지 않는다. 다만 병에 걸려 죽거나 사고로 인해 죽게 되면 이들 가축의 고기를 먹는다. 또한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축제나 결혼식 같은 날에는 양을 잡아 모닥불에 굽는 나름대로의 요리법으로 회식을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알로에 뿌리와 벌꿀을 섞어 담근 술을 마신다.
생활방식(生活方式)
마사이족의 집과 마을은 어떻게 생겼는지 원시형태의 촌락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킬리만자로 북쪽 케냐의 암보셀리 사파리 공원 앞에 있는 한 마을은 약 200여 명이 집단 거주하는 조그마한 단위의 공동주거지였다. 마을의 경계는 잡목과 덤불 등으로 되어 있었다. 타부족이나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택과 공동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경계선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둘러쳐져 있었다. 집의 높이는 땅에서 지붕까지 2m 내외의 토담이다. 더욱이 출입구는 비좁게 만들어져 있어 허리를 구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출입구에서 꼬부랑 'S' 자로 연결된 통로 끝에는 원형의 거실겸 부엌이 있고, 이 거실에서 사방으로 침실이 서너 곳 붙어 있다. 통로가 꼬부랑한 것은 야생동물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출입구에는 문이 없는데 그 이유는 한 마을에서 언제 누구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한 것이라고 한다.
마사이 족은 소를 방목하기 때문에 우기와 건기에 따라 물과 초원을 찾아 이동한다. 그러므로 집이나 촌락은 영구적이 아닌 임시적인 것이면 족하다. 한번 정착했던 마을을 떠나면 3~4년 이후에야 그곳으로 되돌아 온다. 집을 지을 때는 벽과 천장 모두 쇠똥을 재료로 한다. 소를 사육하는 마사이족에게는 쇠똥은 입수하기 쉽다. 쇠똥은 섬유질이며 기름기가 있어 우기에 비바람을 훌륭히 견뎌낸다. 또 고산지대이므로 우기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춥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벽 등 건물재료로 썼던 쇠똥을 뜯어모아 불을 피운다. 연료와 요리를 위한 편리한 재료가 곧 쇠똥이다. 그래서 마사이족 노인들은 연기 때문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사람들이 많다. 마사이족은 소와 양과 염소를 사육하지만 그 중에서도 소에 큰 비중을 둔다. 학자들의 문헌에 의하면 그들의 소에 대한 가치관, 생활관은 또하나의 재미있는 화제가 된다.
마사이족의 이상적인 생활은 우선 소의 마리수를 증가시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일손 즉 아기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다수의 여자를 거느려야 하며 때문에 마사이족도 기타 아프리카 부족과 같이 일부다처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방목을 위해 장기간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 오랫만에 귀가하면 복수의 처들이 기다린다. 그러나 마사이족은 섹스를 즐긴다기보다 아기를 낳게 하는 생산활동으로 간주한다. 만약 한 남자가 체력 부족으로 귀가 기간 중 복수의 처 모두에게 생산 활동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가장 친한 동료에게 부탁하여 생산활동을 대행케 한다. 그러할 경우 그 다음 귀가 때에 그 동료가 체력이 부족하다면 품앗이로 갚는 것이 마사이족 사회의 전통 관행이다.
그러나 마사이족의 신앙과 생활은 궁극적으로 은가이 신의 의지에 귀결된다. 그렇다고 소의 수가 많다는 것이 가치관, 생활관의 기준은 아니다. 현재 대군의 소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소수의 소를 가진 자에게 뽐내거나 자랑해서는 안되며 또한 많이 가진 자를 질투해서도 안된다. 이 경우 두 사람 모두가 천벌을 받는다. 친구를 사귀거나 사윗감을 고를 때에도 그 선택의 기준은 소의 수가 아니라 '은가이닛트' 즉 은가이 정신이 담겨있는 인간이라야 한다. 은가이닛트란 소를 사육하는데 대한 기본적인 겸허한 태도를 말한다. 소를 존경하고 모든 미적 영감의 원천이 곧 소라고 생각하며 사람보다 소가 더 소중하고 현명한 존재라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마사이족은 소를 '앞에서 끌고 간다' 는 말대신 '뒤에서 몰고 따라간다' 는 표현을 쓴다.
사회조직(社會組織)
마사이족 사회조직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엄격한 연령계층제(Age grade system)이다. 사람의 일생은 마치 대나무 마디같이 소년에서 청년 그리고 중년에서 노년으로 진행된다. 다른 계층으로 옮겨갈 때는 소위 '통과의례(通過儀禮)' 라는 의식을 치른다.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이러한 통과의례가 소멸된 곳도 많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등 아직도 미개사회의 부족들에게는 하나의 전통문화로 계승되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우리사회에서도 오늘날까지 성인식(成人式)이 행해지고 있다. 20세가 된 남녀 청소년들이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인으로서 대우받고 사람으로서 독립된 개체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식을 통하여 자신과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행위다. 그러나 오늘날 성인이 된 연령층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그러한 의식으로 끝나버리게 되지만 마사이족을 비롯하여 이 지구상의 꽤 많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미개부족들은 이와 같은 의식이 끝난 이후에는 그들이 속하는 연령계층에서 집단을 형성하여 전통관례에 따라 부여된 의무를 수행하고 권리를 향유한다. 마사이족의 경우 이 연령계층제는 4등급으로 구분된다. 즉 소년그룹, 청년그룹, 중년그룹, 노년그룹이 그것이다.
소년그룹은 대개 12세 미만의 연령층으로서 어린시절 즉 성장기에 있으며, 사회적으로 일정한 의무가 부여된 것은 없다. 그 대신 청년그룹은 12~13세부터 27~28세 사이의 연령층으로서 할례(割禮)와 성인식을 거쳐, 병사촌에 들어가 일정기간의 합숙훈련을 마치고 자기 부족을 지키는 모란(Moran) 즉 전사(戰士)가 된다. 그 다음 중년그룹은 27~28세부터 45~46세 사이의 연령층으로서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방목을 하며 한편 정치 활동에도 참여한다. 45~46세 이상이 되면 노년그룹에 속한다. 장로조(長老組)라고도 하며 주로 마을의 제사나 의식을 담당한다. 이러한 연령계층제는 비단 아프리카 원시사회 뿐만 아니라 남태평양이나, 인도 티베트, 북미와 남미의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의 화랑도 조직을 연령계층제의 청년그룹으로 볼 수 있고, 일본 서남지방의 어촌에서는 공동 어로 작업을 하는 젊은이 그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화제가 될 만한 것은 연령계층제인 마사이족 사회에서 특히 청년그룹을 형성하여 소위 '모란' 이 되는 과정이다.
의식(儀式)
마사이족의 소년과 소녀는 5~12세 사이에 일단 할례(circumcision) 의식을 거친다. 소년들은 할례 이전에 흰색 진흙을 쇠똥에 이겨 온몸에 바르고 두 달 동안 집단을 이루어 여러 지방을 순회한다. 이들은 할례 전날 몸을 씻고 의례에 응한다. 표피절개 때문에 나온 피는 소가죽에 담아서 머리 위에 붓는다.
마사이족은 할례시술을 마친 후 잇따라 집단으로 성인식을 갖게 된다. 이 의식은 남자의 경우 통과의례의 하나로서 신체의 여섯 군데(양쪽 볼, 양쪽 팔, 양쪽 발)에 송곳 같은 불칼로 찢어 흠자국을 남긴다. 이는 성인이 된다는 축복과 한 사람의 남성이 됨으로써 기성세대와의 대립관계에 접어드는데 대한 저주의 뜻이라고 한다. 이렇게 구성된 청년그룹은 양친부모와 이별하고 마을에서 동떨어진 공동숙사인 '마니아타' (Manyata)라고 하는 병사촌(兵士村)에 수용된다. 거기서 장기간 집단 훈련을 받는다. 학습은 소를 방목하는 방법, 마사이족의 전통문화 등이며 훈련은 수렵, 야생동물을 창과 칼로 잡는 실습으로 맹수를 죽인 직후 목을 따고 생피를 마시며 그들은 용맹을 기른다. 이때 그들은 다함께 "우리는 마사이다. 우리는 용감한 마사이의 모란(戰士)이다"라고 소리친다. 그리고는 둥근 원을 그리듯 함께 돌며 춤을 춘다.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모두들 정신을 잃고 황홀상태에 빠진다. 트랜스 상태가 된 모란집단은 춤을 추다가 갑자기 대열에서 뛰어나와 지상에서 1m 가량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다른 동료들이 이를 저지한다. 그리고는 서로가 마주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의식을 잃는다. 트랜스 상태는 굿을 할 때 무당이 주문을 외다가 종국에 가서 '신이 들리게 되는 단계' 와 같은 것을 한다.
소녀의 할례식은 야만적이고 비참하다. 음핵 일부를 절제하므로 통증을 없애기 위해 진통제로 쐐기풀을 준비한다. 소녀들도 집단으로 춤을 추게 하고 절제 때의 고통을 참을 수 있도록 독특한 기법을 쓴다. 소녀들은 할례의식 이후 6개월이 지나야 결혼할 수 있다.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친 다음 한 집단을 형성하는 의식을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라고 하며 의식을 치룬 이후 특정 집단의 형성이 없는 단순 통과의례와는 구별된다.
오색구슬을 엮어 만든 목걸이와 까까머리가 특징이다.
전사(戰士)들의 생활
모란(戰士)에 속하는 청년 연령층 그룹은 부모를 떠나 격리된 합숙소에서 장기간 맹훈에 임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가사일을 돕는 것은 면제된다. 그러나 부족과 마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생기면 곧 소집당한다. 특히 모란은 소를 방목하는 기술 즉 소떼를 몰고 풀을 먹이는 일, 소들의 목에 방울을 다는 일, 한밤에 소나 사람을 노려 마을 근처에서 으르렁대는 맹수들이 습격하면 이들 짐승과 싸우는 일을 한다. 사자와 맞싸워 때려 잡는데 성공하는 자는 그날 밤 '마니아타' 에 몰려 온 소녀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 잡는 특권이 부여된다. 이렇게 용감무쌍한 기질은 마사이 전사이외의 어떤 다른 부족에게서도 볼 수 없다.
또한 다른 부족에게 빼앗긴 소를 돌려받거나 다른 부족들의 소를 약탈하는 일도 마사이 모란에게 주어진 권리며 의무다. 그 중에서도 남의 소를 약탈 하는데는 용기와 힘과 지혜가 필요하므로 이 일에는 모란의 위신이 걸려 있다. 모란이 부족과 마을과 소를 지키기 위해서는 넓은 사바나를 무대로 항상 경계에 임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활동은 유목민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활동이다. 야생동물이 우글거리는 사바나를 몇 사람의 모란이 지키면서 때로는 다른 부족의 적과 때로는 맹수와 싸운다. 다른 부족과의 투쟁에서 상대적수를 죽인 모란은 타조깃으로 된 갈기를 쓰고, 사자를 때려잡은 모란은 사자털 고깔을 쓴다.
타조깃털의 갈기는 전투에서 타부족을 죽였다는 표징이며, 짐승털 고깔은 사자를 떼려 잡은 표징이다.
어느 촌락에서 어떤 축제가 행해지면 모란들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용감하고 화려한 차림으로 그들의 독특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북돋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란은 소녀들에게 인기가 있다. 아직 결혼 전의 싱싱한 소녀들이 병사촌을 찾아온다. 할례 이후 미혼의 아가씨들은 모란과의 정사가 허용된다. 병사촌을 방문하는 어린 소녀들은 상대로 세 사람의 애인을 선정한다. 만일 제1의 모란이 외출하고 없을 때는 제2의 모란과, 제2의 모란조차 부재일 경우에는 제3의 애인과 정사를 나눈다. 이런 풍습은 모란끼리 잘 이해되고 있어 내 애인이 동료와 놀아났다고 하여 별다른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린 소녀들이 병사촌을 방문하는 것은 할례 이후에만 허용된다. 그러나 결혼하게 되면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낳아 길러야 한다.
모란이 즐겨 합창하는 노래의 뜻은 이러하다. "독수리여, 나를 따라와요, 적이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적을 죽인다. 독수리여 너는 어쨌든 고기밥을 챙길 걸세." 모란은 자기가 반드시 이긴다고만 믿지 않는다. 패배도 받아들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전투에 임할 때는 이 노래를 부른다. 마사이족의 장례식은 유별나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들판에 내다버린다. 독수리가 시체를 뜯어먹고 뼈만 남기면 이 뼈를 가족들이 정성스럽게 모아 단지에 넣어 다시 집 근처로 가져와서 수호신으로 모신다.
모란은 병사촌에서 일상생활과 전투, 그리고 약탈 행위를 함께 하며 결속을 다진다. 동료들간의 우의, 충성심이 여기에서 생겨나고 이것이 전사들의 신조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식부터 소녀 애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공평하게 분배한다. 먼길을 떠난 모란이 친구의 집에 들어가서 친구의 아내와 동침하면 남편이 귀가하여 집 앞에 꽂혀진 모란의 창을 보고 다른 집으로 피한다.
소 피는 우유에 섞어 병후나 산후 조리때 마신다.
마사이족은 서로 만났을 때 인사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상대방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수분 즉 물은 마사이족에게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상대에게 이 귀중한 수분을 발라주는 것이 우정과 축복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부사람과의 인사때는 침을 뱉지 않는다. 할례 이후의 남녀는 악수를 하고 할례 이전의 어린이는 머리를 내민다. 이때 외부 사람들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또다른 진기한 풍습으로는 마사이 여자들은 서서 소변을 본다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기니아만의 사바나 원주민 여성들도 같은 풍습이다.
모란 즉 전사 청년그룹은 소녀나 과부 등과의 성접촉이 가능하지만 전사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중년그룹으로 이행하기까지 결혼을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전사들은 당연히 결혼이 늦어진다. 반면에 여자들은 첫 월경이 있은 후 할례와 성인식을 마치면 결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결혼 가능한 인구비율상 불균형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마사이족 사회에서 마사이족 결혼을 해야 할 남녀의 수를 비교하면 여자가 남아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년그룹 남성이 복수의 부인을 거느리는 비율이 그만큼 높아진다.
복처, 중혼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다른 요인은 혼수(婚需) 문제다. 동부 아프리카에서는 이를 ‘다우리’ 라고 한다. 신부를 얻으려면 신부측에서 출산, 노동력의 대가로 신랑측에 많은 가축이나 금품을 요구한다. 다우리 조달에 있어서 청년들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중년들은 재산이 있으므로 유리한 조건에 있다. 여기서 곧 청년그룹과 중년그룹간의 결혼 갈등이 생긴다.
탄자니아에 있는 소수 부족 니아큐사족은 이러한 갈등 때문에 연령계층 그룹별로 마을을 별도로 만들어 사는 곳도 있다고 한다.
마사이족의 변화와 미래
그러나 이러한 진기한 풍습을 고수해 온 마사이족 사회도 이제는 문명세계의 거센 물결에 견디지 못하여 차츰 개방되고 있다. 전통의상을 벗고 영어를 배우고 현대교육을 받기 위해 도회로 나간 젊은이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귓불에 구멍을 크게 했던 치장도 어린이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사이족 사회가 현대 문명을 등지고 벽지에서 소의 방목에만 종사하는 시대는 점차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한국외국어 대학 김윤진 교수 저 『동아프리카사(史)』에 기술된 마사이족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마사이는 19세기 종족의 분리로 인해 부족간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1870년경 마사이족의 세력이 쇠퇴하게 되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공동 유목생활을 하던 마사이와 크와비(Kwavi)간의 싸움이 수많은 인명 손실을 초래한다. 전염병으로 인한 인명 손실 또한 컸으며, 가축의 떼죽음은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원인 중의 하나는 1880년 이후 마사이의 최고 지도자이며 제사장인 라이본(Laibon)들간의 반목과 경쟁이었다.
유럽인과 최초로 접촉을 갖게 된 라이본은 1788년 태생의 수페트(Supet)로서 푸르코(Purko) 마사이의 지도자가 된다. 강력한 지도자를 둔 푸르코 마사이는 유목 마사이의 주도적인 그룹으로 급부상한다. 수페트의 사망과 함께 1866년에 그의 아들 음바티안(Mbatian)은 라이본을 승계한다. 음바티안은 그의 아버지 수페트가 시작한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결심을 한다. 라이본 음바티안은 제사장으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자질을 소유하였기에 모든 유목 마사이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1890년, 음바티안의 사망으로 두 아들 레나나(Lenana)와 센데요(Sendeyo)가 마사이족을 두 쪽으로 분할하여 반목이 시작된다. 센데요를 지지하는 마사이는 탄자니아의 로이타(Loita) 부근에 자리잡고, 레나나의 지지자들은 케냐의 협곡지대에 자리하였다.
레나나는 두 개의 전쟁에 직면하게 된다. 그 하나는 케냐쪽의 키쿠유족으로부터의 압력이며, 다른 하나는 탄자니아의 센데요를 지지하는 마사이족으로부터의 압력이었다. 레나나는 전쟁을 회피할 의도를 가지고, 스미스 요새(Fort Smith)에 주둔한 영국군의 도움을 청한다. 레나나로서는 영국인들이 그 자신을 마사이족 최고의 추장으로 인정해 준 사실이 천만다행의 구원이었다.
마사이족의 최고 통치자로 라이본을 인정한 영국 정부는 두 개의 마사이 협정을 맺게 된다. 첫 번째 협정은 1904년에 이루어지며, 마사이족은 은공(Ngong)과 라이키피아(Laikipia) 두 거주 보호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약속되었다. 영국 정부는 마사이족이 이 협약에 불만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나나는 1911년에 사망하고, 레갈리슈(Legalishu)가 라이본을 승계한다. 승계 후 몇 주만에 제2차 마사이 협약이 조인된다. 이 협약으로 마사이족은 라이키피아를 떠나게 되며, 라이키피아는 유럽인 전용 주거지로 보호된다. 이로써 마사이족의 위세는 서서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마사이 영역과 세력권의 축소 쇠퇴는 비단 영국 등 유럽인들의 지배 때문만은 아니다. 케냐와 탄자니아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들 부족은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거주지역 영토를 지도급 추장들이 신흥재벌에게 분할 매각했다. 선거철이 되면 위정자들이 표를 모으기 위해 대표추장들을 매수하는 새로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일부 돈이 생긴 마사이는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넥타이 차림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는 도시로 아니면 해외로 신식교육을 위해 유학시킨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는 마사이말로 ‘찬물이 나오는 곳’ 이라는 뜻이다. 탄자니아의 국립 사파리 공원인 ‘응고롱고로’ 도 마사이말로 ‘소의 목에 달린 방울소리’ 란 뜻에서 유래된다. 이들 지명으로 미루어 보아 옛적에는 마사이족이 킬리만자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는 케냐 전역과 탄자니아의 중앙일대 그리고 서부의 빅토리아 호수까지 넓은 영토를 점유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마사이의 생활권과 세력권은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2천여 소수부족들의 공통된 양상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간섭과 내부의 변화로 말미암아 축소 쇠퇴해 가고 있으며 그들의 전통문화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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