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잘 살아가는 이야기

30년 정들었던 공간(집)과 이별을 하다

뿅망치 2019. 5. 9. 20:36

이별을 사람들과 하는 것만은 아니다.

가지고 있던 물건, 자신이 살던 고국이나 고향, 자신이 살던 집 등 등....

사물과도 이별을 하게 된다.

이별이라는 단어 속에는 애틋하다는 의미가 내포가 되어 있어서 이별은 마음 속에 여러 가지의 감정을 남기게 된다.

 

오늘 밤을 지나면 꼬박 30년을 살았던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된다.

19895월에 이사를 와서 20195월에 이사를 가게 되니 어지간히 오래 산 셈이다.

이사를 자주 가야 재산을 늘린다고 하는데 한 군데서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재태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셈이다.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 이사를 하고 이제 두 번째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은평구 응암동에 살다가 방배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 때는 강남과 강북의 집값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때였었다.

강남의 34평 아파트가 1억 천에서 1억 이천 정도였었고 그 때 남가좌동의 34평 아파트가 1억정도였으니 차이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응암동에서 방배동 서문여고 쪽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집사람의 아는 언니 되는 사람이 이곳에 살았었는데 이쪽으로 이사를 오라고 권유를 해서 오게 되었다.

응암동에서 자녀교육을 하는 것과 이곳에서 자녀교육을 하는 것은 자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득을 하는 바람에 모자라는 돈은 융자를 해서 무리를 해서 오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사를 오게 된 것이 내 인생에서 선택을 가장 잘 한 것 중의 한 가지가 딘 셈이다.

 

그런데 이사를 온 동네가 서울에 물난리가 나면 상습적으로 침수가 되는 동네였었는데 이사를 올 때는 그런 내용을 몰랐었다.

1990.9월 일산이 물에 잠기는 홍수가 날 때 서울에서 가장 먼저 침수가 되었던 동네가 방배동 서문여고 쪽이었는데 담장까지 물에 잠겨서 3일 동안 잠겨 있었다.

 

그 때가 마침 수원에 있는 교육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어서 아침에 물에 넘쳐서 대문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보면서 버스를 타러 가다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사당역에서 수원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왔더니, 골목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고 마당으로 물이 넘쳐 들어오고 있었다.

집에는 여섯 살짜리 아들과 네 살짜리 딸과 집사람과 장모님이 있었으니 그 들을 두고 교육원으로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참으로 미련했었다.

금방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데 이대로 있어서는 큰일 날 것 같아서 아이 둘을 옆구리에 끼고 장모님은 내 허리춤을 잡고 큰 길 가로 나와서 택시를 태워서 잠실 처남집으로 보내고 집으로 다시 왔더니 안방의 1/3만큼 물이 차오른다.

다행히 더는 불어나지 않아서 집사람과 둘이서 필사적으로 다락으로 가제도구를 올렸지만 역부족으로 포기를 하고 오후에 군인들이 보트를 타고 집집마다 사람들을 태우러 와서 보트를 타고 나왔었다.

 

3일 동안 물에 잠겨 있다가 일산에 둑이 터지면서 물이 빠졌는데 물이 빠져나간 뒤에 집에 와 봤더니 거실과 안방에 뻘이 쌓여 있고 가재도구도 어지러이 흩어져 있어서 할 말을 잃었었다.

다시 살 수 있도록 정리하는데 두 달이 더 걸렸었고 덕분에 친척들이 다 동원되어서 빨래를 집에 싣고 가서 해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집집마다 그랬다.

 

물난리가 나던 그 해에 사당 천 복개공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공사마무리가 덜 되어서 그런 사단이 벌어졌지만, 복개천 공사가 완공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강물이 거꾸로 차 오르기 때문에 어차피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고 그 때 압구정동, 개포동, 대치동, 풍남동, 등 한 강변을 끼고 있는 아파트들은 물에 다 잠겼었다.

 

이 집에서 물난리를 워낙 호되게 겪어서 이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때 그 사건이다.

그 후로는 물에 잠기는 일이 없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홍수가 나서 똥물을 뒤집어쓰더라고 이사를 가지 말고 사는 것이 좋으니 그냥 살으라고 해서 살다가 보니 30여년을 살게 되었다.

 

이야기인 즉슨 서문여중고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학교가 멀어서 야자하고 늦게 오면 얼마나 불안한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면서....

그 때 4살짜리가 서문여중고를 나와서 지금은 33살이 되어서 작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등하교 때문에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집에서 30년 동안 살면서 가족들이 건강하고 집안에도 문제가 없었으며 아이들도 대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아들은 결혼까지 시켜서 분가를 했고 딸도 결혼은 아직 안 했지만 분가를 했으니 집터가 좋은 집이었다는 생각이다.

금전적으로 부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으로 이사를 온 보람이 있어서 나름대로 교육적으로 성공하고 이사를 가는 셈이니 이사를 온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자녀가 잘 자라서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이 주는 것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성공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를 오지 않았더라도 그리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공부를 많이 하는 곳에서 살게 되면 자녀들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이사를 한 목적도 결국 공부하는 환경 가운데서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이니 현대의 부모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해 줄 주 있는 선물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후배들이나 직장의 후배들이 상담을 하면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8학군으로 가라고 권유를 하였었는데 자녀의 공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관심이 있다면 그리 하는 것이 자녀들이 공부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집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홍수 이야기와 공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두 가지가 이 집에서 일어났거나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제대를 하면서 75년도에 서울이 입성을 해서 44년을 서울시민으로 살다가 공기가 좋은 곳을 찾아 이제 경기도민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다시 서울 시민이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인생에서 한 단락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한 집에서 30여년을 살다가 보니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학부모들끼리 서로 아는 경우가 많아서 친한 사람들도 많고, 그 물난리를 같이 겪은 사람들도 많아서 여자들의 경우에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사람들끼리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는 중이다.

 

우리 역시 이사를 가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낸 동네이니 잊을 수도 없고 그 때 만난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이니 이 동네는 자주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집도 헐어지지 않는 한 지나가는 길에 보면서 지나가게 될 것이고......

 

그리고...

30여 년 동안 잘 지내게 하고 발전을 하게 해준 집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